집행위 흔들렸지만, 스타는 빛나고, 관객은 끝까지 즐긴다[부산영화제 현장에서]

이정우 기자 2023. 10. 1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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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폐막… 영화인·관객·조직 ‘3대 축’으로 본 부산영화제
올 이사장·집행위원장 공석으로
행사 대폭 축소 초유사태 속 개막
주윤발 개막 인사로 분위기 반전
버닝·미나리·서치 등 작품 모은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큰 의미
조직위 긴 파행 비판하던 관객들
영화 앞에선 울고 웃으며 박수쳐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작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제는 무엇으로 살까요. 영화를 좋아했던 대학원생에서 영화 담당 기자로 10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방문하며 맴돌았던 한 가지 질문입니다. 영화제엔 당연히 영화가 필요하겠죠.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 소위 스타들은 축제를 빛냅니다. 다른 한 축인 관객은 영화를 보며 그 영화를 빛냅니다. 그리고 행사를 치를 조직이 있어야겠죠. 올해 영화제 역시 세 요소가 맞물리며 13일 폐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4일 개막부터 5일간 부산에 머물며 영화를 보고, 영화인을 만나며, 영화제를 느낀 기자의 소회를 정리해봤습니다.

홍콩 영화의 큰 형님 저우룬파(주윤발)가 관객들과 셀피를 찍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화려한 막을 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스타

부산영화제의 초반 주인공은 단연 홍콩 배우 저우룬파(周潤發)였다. 한국 대표배우 송강호와 포옹하며 멋지게 축제의 막을 연 ‘따거’(큰 형님)는 소탈함과 기백 넘치는 모습으로 화제를 모았다. 5일 기자회견에서 “영화가 없으면 주윤발도 없다”고 한 저우룬파는 “나를 대단한 슈퍼스타라 생각할 수 있지만,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낮췄다. 홍콩영화 침체의 원인으로 “중국 정부의 검열 때문”이라고 지적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정이삭(왼쪽부터)·저스틴 전 감독, 배우 스티븐 연·존 조 등이 자리한 모습.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단연 돋보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아쉬움을 남겼다.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과 스티븐 연, ‘파친코’의 저스틴 전 감독, ‘서치’의 존 조 등 코리안 아메리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그들의 생각을 들은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도였다. 다만 시기가 아쉬웠다. 상영한 6편 중 3편(‘버닝’ ‘미나리’ ‘서치’)이 지난 작품이어서 시대를 선도한다기보단 회고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패스트 라이브즈’와의 만남은 반가웠지만, 셀린 송 감독의 불참으로 빛이 바랬다. “오래전부터 기획한 프로젝트”였다지만 좀 더 과감하게 세계 속 코리안 아메리칸과 그들의 영화를 발굴했다면 어땠을까.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가여운 것들’.

영화감독 중에선 단연 일본의 두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돋보였다. 한국에서도 팬이 많아 이들의 영화는 예매 1순위였다. 약진하는 인도네시아 영화 등 제3세계를 알차게 채운 점도 좋았다. 다만 유럽이나 북미 감독들은 상대적으로 만나기 어려웠다. ‘가여운 것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를 비롯해 리산드로 알론소, 빅토르 에리세, 알렉산더 페인 등의 목소리로 영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티모스 감독 등 일부가 영화 상영에 앞서 메시지를 건네긴 했지만, 아쉬움을 채우긴 역부족이었다.

내홍으로 흔들렸지만, 영화에 대한 열기로 영화제는 올해도 뜨거웠다.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조직

규모가 축소되고, 스타들의 내한이 위축된 건 개막을 앞두고 부산영화제 조직이 크게 흔들린 탓이 크다. 올해 영화제는 이사장·집행위원장 공석이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치러졌다. 그런 상황에서 집행위원회는 칸·베니스·베를린 영화제 주요 작품들을 모셔와 내실을 기하는 데 열중했다. 급한 불은 껐지만 내년 영화제를 생각하면 그리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차기 집행위원장 임명과 조직 개편 등을 두고 여전히 내홍의 불씨가 남아 있다. 행사를 치르기 위한 ‘실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올해 영화제도 전년보다 줄어든 예산으로 치러졌다. 내년엔 더욱 허리를 졸라매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내년 영화제 지원 예산은 올해 56억 원의 절반 수준인 28억 원으로 반 토막 났다. 영진위의 일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박기용 영진위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으로 예산 편성에 결정권이 없다”며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입장”이라고 말했다. 현장과의 소통 대신 자포자기식 통보를 택한 것. 한 관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부산영화제야 버티겠지만 소규모 영화제들은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위상은 부쩍 커졌다. 영화의전당 외벽에 큼지막하게 걸린 디즈니플러스 ‘비질란테’의 현수막은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한국영화 화제작을 소개하는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에 초청된 3편 중 2편(‘독전2’ ‘발레리나’)이 OTT 작품이었다.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관객

그렇지만 영화제의 주인공이 바뀔 수준은 아니었다. 여전히 좋은 영화, 새로운 영화를 극장에서 보려는 많은 관객이 극장을 메웠다. 새삼 느낀 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건 진귀한 체험이란 사실.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를 본 후, 외국 기자들은 ‘탈(脫)조선’이란 개념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정치 성향이 물씬 묻어나는 이탈리아 영화 ‘찬란한 내일로’나 중국의 노동 현실을 보여주는 왕빙의 다큐멘터리 ‘청춘(봄)’ 모두 지역성 강한 작품이지만, 세계 각국의 관객들은 함께 웃고, 함께 먹먹해했다.

특히 7일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를 본 순간은 이상적인 극장 경험이었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선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깔깔거리고, 박수 치다 이내 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날이 그랬다. 팔짱을 낀 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나 같은 관객도 무장해제돼 함께 웃고, 흐느끼다 영화가 끝난 후 함께 박수를 쳤다.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이 감각을 공유하고 감동이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영화제에서 만난 한 감독은 “요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게 없다”고 했다. 맞는 부분이 있지만, 결국 틀린 말이다. 실망하고 외면한다는 건 여전히 영화에 대해 기대한다는 것 아닐까. 수많은 관객은 여전히 좋은 영화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리고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영화는 완성된다. 이것이 영화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 아닐까.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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