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패권 시대 우리말] ⑧전문가들 "낯선 용어 인지도부터 높여야"
[편집자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기상 재해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이슈가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습니다. 우주개발, 양자컴퓨팅, 챗GPT 등 첨단 과학기술도 어느새 피부로 체감할 정도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부는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하고 과학기술 중심의 패권 경쟁을 선도하겠다고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알려지는 다양한 전문용어는 국민들이 편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동아사이언스는 국어문화원연합회와 수년째 과학기술, 의학 용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이는 방안을 찾는 기획을 진행했습니다. 올해는 정부가 의지를 보이고 있는 국가전략기술 관련 용어들을 들여다보고 국민들의 세금이 투입되는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기획을 진행합니다.
과학기술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어 기술주권 확립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한 국가전략기술육성특별법은 기술주권을 확립하겠다는 의지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의지만큼 국민들의 정책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기술 분야를 이해하기 위한 전문용어는 비전문가인 국민들에게 쉽지 않다. 어려운 용어는 국민들이 정책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데 장벽으로 작용한다. 지난달 모인 의학, 화학, 물리, 정보통신 전문가 4명은 국민의 과학기술분야 이해력을 증진하기 위해선 먼저 용어에 대한 인지도 향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용어의 인지도를 높인 후 해당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합성생물학·세포유전자 치료…새로운 분야 대두됐지만 용어 이해도는 '부족'
과학기술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새롭게 각광받는 분야도 늘어나고 있다. '합성생물학'이나 '세포유전자치료'는 의생명 분야에서 떠오른 신분야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아직 공통된 개념정립이 이뤄지지 않은 용어가 많다.
윤경식 경희대 의대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 교수는 "합성생물학이나 세포유전자치료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새로운 도전이 이뤄지는 분야로 아직 국내외에서도 이제 막 발전이 이뤄졌다"며 "국내에선 관련 인프라가 형성중인 단계이지만 국가 전략 기술로 선택되면서 전문용어들이 대중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과제나 신규 사업에서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그대로 비전문가인 대중에게 사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윤 교수는 "새로운 분야라는 특성에 더해 낯선 용어까지 사용되면서 이 분야에 대한 국민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지지가 없이는 기술육성을 위한 사업이 힘을 받기도 어렵다. 정부가 실시하는 연구개발(R&D) 사업 추진은 국민 관심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국민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 용어의 개념 정립이 선결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윤 교수는 "국가기술 전략과제가 제시될 때 최소한 절반 이상의 용어에 대해선 국내 학회 내부적으로 완결성 있는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R&D 사업을 추진하는 공무원과 언론 또한 용어의 개념정립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윤 교수는 덧붙였다. 국민들에게 전달할 사업을 계획하거나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 또한 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란 지적이다. 윤 교수는 "언론과 소통을 하다 보면 용어에 대한 이해차로 소통이 다소 어려울 때가 있다"면서 "연구자와 비연구자 간 용어소통에 대한 교육활동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의학분야로 예를 들면 암 치료에 혁명을 가져올 세포유전자치료제와 같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연구주제가 있지만 이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의 인지도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며 "용어는 처음 들여올 때 개념이 정립되고 알려지는 만큼 신기술이 들어오는 지금 시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물리학자는 '전기장', 전기공학자는 '전계' …같은 뜻 다른 용어
전문가들은 국민 이해 제고를 위한 전문용어 인지도 향상에 대해 공감을 표하면서도 어떤 용어의 사용을 결정할지 전문가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끼리도 전문분야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상이한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실제 같은 현상이나 물질을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학계마다 다르게 사용하는 용어도 있다. 유건호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는 "물리학과에선 전기력이 작용하는 공간을 '전기장'이라고 부르지만 전기공학에선 '전계'라고 부른다"고 예를 들었다. 전기장과 전계는 모두 영어로 'electric field'로, 전하가 힘을 받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물리학도, 전기공학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두 용어가 완전히 같은 개념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긴 쉽지 않다.
일각에선 전문용어를 획일적으로 통일하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에서 용어를 통일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개념을 뜻하는 수많은 용어 중 무엇이 가장 적합할 것인지 두고 학계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같은 학계, 같은 분야이지만 세대 간 차이도 발생했다.
의학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의학계는 과별 경계가 높다. 윤 교수는 "예컨대 소화기 내과 전공의가 다른 외과, 정형외과 등 다른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모두 이해할 순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언어는 수정되기도 하고 진화하기도 한다"며 언어에 대해 경직된 입장을 버려야한다고 강조했다. '쿼크'가 그 예다. 쿼크는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지지 않는, 그 자체로 가장 근본적인 입자를 말한다. 1964년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처음 명명했다. 비슷한 시기 쿼크의 개념을 떠올린 물리학자 조지 츠바이크는 이를 두고 '에이스(Ace)'라고 명명했다.
이 교수는 "과학에서 만들어내는 용어는 전혀 낯선 개념"이라며 "전문용어는 처음부터 합리적으로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탄생하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쿼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지 쿼크라는 이름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국립국어원에서 표준어를 정하듯 과학 분야에서도 관련 기구를 만들어 용어의 쓰임새를 검토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언했다. 또 "과학 분야 기사를 쓸 땐 같은 개념을 설명하는 다른 용어를 병기해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용어의 시민권' 얻은 콜라겐, 5G, 자율주행… 이유는 자연스런 체득
전문가들은 "용어의 인지도와 이해도를 구분해야한다"고 입을 모은다. 인지도가 높은 용어는 '자율주행', '5G', '콜라겐'처럼 대다수의 국민이 언론매체나 상업광고 등에 의해 많이 노출되어 친숙하게 느끼는 용어를 말한다. 용어의 이해도는 말 그대로 그 용어가 가리키는 개념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히 이해하고 있느냐다.
류호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플렉시블전자소자연구실 책임연구원은 '용어의 시민권'을 이야기한다. 누가 어떤 용어를 접하더라도 '대충' 어떤 느낌의 용어인지 체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류 연구원은 "4G, 5G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개념을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스마트폰, 노트북 등으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ICT 분야는 연구의 결과물을 국민이 바로 접할 수 있어 용어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도 전에 이미 용어를 체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류 연구원은 "개념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용어와 매칭하는 과정에서 용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고도 설명했다. 우발사체 분야에서 '대형 다단계연소사이클 엔진'이라는 용어를 용어 자체로 듣기만 하면 그 기능이 와닿지 않지만 엔진의 형태를 실제로 살펴보는 순간 이해의 오류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그는 "ICT 분야는 실생활에서의 접목이 빨랐고, 이에 따라 ICT 용어가 국민에게 곧바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에 "ICT 분야는 상업과 밀착돼 있다는 특성이 있어 사용자가 용어에 거부감을 가질 틈이 별로 없지만, 타 과학분야의 상황은 다르다"고 첨언했다. 유 교수는 "어떤 용어를 사용할지 학계 내에서 합의하는 것보다는 우선 여러 용어를 받아들이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류 연구원은 "국가전략기술에 해당하는 모든 용어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기술에 관한 정보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되 받아들이는 건 결국 대중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박정연 기자,박건희 기자 hesse@donga.com,wiss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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