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냉혹하고 잔인한 성장통의 누아르[시네프리뷰]
2023. 10. 11. 09:04
한국 누아르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지만, 초기 ‘날것’ 같은 처절함과 비정함을 감싸 안은, 더불어 이를 완성도 있게 밀고 나가는 영화는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화란>은 의외의 발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목 화란(Hopeless)
제작연도 2023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24분
장르 드라마
감독 김창훈
출연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
개봉 2023년 10월 1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1990년대 시작된 한국 영화 성장기를 이끌었던 중요한 장르 중 하나는 소위 ‘한국형 누아르’다. <게임의 법칙>(1994·장현수), <장미빛 인생>(1994·김홍준), <테러리스트>(1995·김영빈), <초록물고기>(1997·이창동), <비트>(1997·김성수), <친구>(2001·곽경택)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두운 시대상 위에 비극적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적 사회의식을 반영한 한국형 누아르는 ‘한국 영화는 유치하다’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서서히 해체하는 결정적 촉매가 됐다.
이는 시간이 지나며 다른 방향으로 뻗쳐 대중 친화적으로 탈바꿈된 ‘조폭 코미디’라는 노선으로 개척돼 본격적인 흥행에 고삐를 당겼다. 또 2000년대 들어서며 한국 영화의 대표적 유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범죄 스릴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국형 누아르는 이전보다는 못하지만, 아직도 다양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강릉>(2021·윤영빈), <뜨거운 피>(2022·천명관)처럼 저예산이나마 순혈 누아르의 노선을 표방한 소규모 작품이나, 고등학교 폭력서클을 소재로 한 <깡치>(2016·연정모) 시리즈, <짱>(2018·송재덕), <일진>(2018·이수성) 시리즈와 후속으로 기획된 <대가리>(2019·이수성) 시리즈 등의 유사 누아르가 그 빈자리를 메워왔다.
익숙하지만 또 다른 현재형 한국 누아르
형태를 바꿔가며 한국 누아르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지만, 초기 ‘날것’ 같은 처절함과 비정함을 감싸 안은, 더불어 이를 완성도 있게 밀고 나가는 영화는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화란>은 의외의 발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폭력적인 의붓아버지가 지배하는 집과 지옥 같은 학교를 오가는 18세 고등학생 연규(홍사빈 분). 폭력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서 보상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빠듯한 가정형편에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우연히 그의 처지를 알게 된 동네 건달 두목 치건(송중기 분)이 무작정 돈을 빌려준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짧은 인연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긴다.
보도자료에는 제목 ‘화란’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네덜란드를 뜻하는 한자 음역어로서의 화란(和蘭)이다. 주인공 소년 연규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네덜란드로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두 번째 뜻은 재앙과 난리, 재변에 의한 세상의 어지러움이란 뜻의 한자어 화란(禍亂)이다. 연규와 치건의 인연은 그들 각자의 삶에 획기적 전기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갈아버리는 일종의 재앙이 된다.
신인감독을 신뢰한 스타배우의 과감한 변신
영화는 단 한 순간조차 웃음이나 희망을 허용치 않는다. <화란>이 펼쳐 보이는 어둡고 잔인한 소도시의 풍광과 인간군상의 치졸한 삶은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심지어 결말에 도출되는 작은 가능성마저 그냥 작은 쉼표일 뿐이기에 더욱 아리고 개운치 않다.
작품이 세상에 소개되며 가장 눈에 띈 화제는 배우 송중기의 이름이다. 신인감독과 배우들을 주축으로 기획된 중소규모의 작품에 조연급 비중의 배역을 선택한 스타배우의 출연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를 접한 후 작품 자체에 큰 매력을 느낀 송중기의 적극적인 관심이 참여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암울한 현실과 희망 없는 미래에 짓눌린 한 소년에게 작은 돌파구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발버둥칠수록 깊은 생채기를 내는 올무와 같은 존재가 돼가는 중간보스 치건 역을 진중하게 소화해낸다.
뛰어난 듯싶지만 무난하고, 특별한 것 같지만 상투적인 캐릭터와 그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것 같다. 그러나 이를 통해 단순한 인기스타의 한계를 넘어선 폭넓은 중견배우로서의 내실과 신뢰를 공고히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은 이 작품을 주목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화란>은 올해 개최된 76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2023년 가장 바쁜 배우, 김종수
속된 말로 ‘잘 팔리는’ 배우가 있다. 일정기간에 유난히 많은 작품에서 보게 되며 나름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대의 배우. 밀물과 썰물처럼 수많은 배우가 영화 현장을 오고 가지만, 이런 호재는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제작자들에게는 안정적으로 연기력을 신뢰받고 관객에겐 호불호의 폭이 좁은, 무난해 보이지만 뛰어난 배우들에게 가능한 기회다.
그런 배우로 2023년 대한민국 영화계는 김종수를 선택했다. 올해 출연한 영화만 6편, 드라마도 2편이 된다. <화란>에서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보스로 등장한다.
1964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종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고 무대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대학 때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길거리에서 본 연극단원 모집 포스터를 인연으로 찾아간 극단에서 연극 <에쿠우스>(1985)의 주인공으로 발탁되며 본격적인 배우 활동의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지역 배우로서의 활동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KBS 방송국에서 더빙과 리포터, MC 등의 소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울산을 기반으로 다른 욕심 없이 활동해오던 김종수에게 울산에서 진행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 오디션은 일종의 재미 삼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합격과 출연은 연기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소소한 역할을 꾸준히 소화해왔다. 그중 특별히 드라마 <미생>(2014)의 김부련 부장 역과 영화 <1987>(2017·사진)에서 박종철 열사의 부친인 박정기 옹 연기는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사실상 그의 연기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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