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편집실에서]
추석 연휴를 보내고 돌아와 보니 어느새 10월입니다. 2023년 남은 달력도 겨우 석 장뿐. 이번 연휴, 꽤 길었지요. 다들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점점 잊혀가는 풍경이 눈에 밟히더군요.
변화는 이미 곳곳에서 시작됐지요. 귀성길과 귀경길이 여전히 막혔다지만 한꺼번에 우르르 내려갔다 올라오는 예전의 정형화된 패턴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벌초를 일찌감치 다녀오는 이, 차례 대신 가족 단위 여행을 떠나는 이, 내친김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 지역사회에서 느슨한 연대를 실천하는 이, 혼자만의 힐링과 여유를 택하는 이, 취업과 수험 준비를 위해 열공 모드에 돌입하는 이, 휴식은 고사하고 연휴에 더 바쁜 사람들까지 추석을 보내는 저마다의 사연은 다양하기만 합니다. 도심이 텅 빈다는 이야기도 옛말이 됐습니다. 고궁, 영화관,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식물원, 백화점 등 시내에 인파가 더 몰립니다. 한류 바람을 타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가세했고요.
차례상은 성균관이 표준안을 배포할 정도로 과거에 비하면 꽤 간소화됐습니다. 그럼에도 10명 중 6명꼴로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응답한 최근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드러나듯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추석민심’이라고 오랜만에 모인 가족, 친지들이 밥상머리에서 정치 현안을 주제로 뜨거운 설전을 벌이는 일도 옛말이 됐습니다. 지금은 그랬다가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 각오를 해야 할지 모릅니다. ‘결혼은?’, ‘아이는?’, ‘취업은?’, ‘성적은?’ 등의 질문은 금기사항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한가위랍시고 스마트폰을 통한 문자가 줄을 이었습니다만, 저만 해도 정작 얼굴을 본 사람은 몇 안 됩니다. 한복을 차려입고, 정성껏 음식을 내고, 북적북적 오가는 사람도 많던 때가 분명 있기는 했는데 말이지요. 너무 날이 서 있고, 거칠게 대립하는 사회를 살아가다 보니 다들 명절 때만이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은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항저우아시안게임 시청은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 연휴를 보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곳곳에 깃든 땀과 눈물이 감동을 배가시켰는데요. 이 대회에도 세태의 흐름과 변화상은 어김없이 녹아 있었습니다. 올해 처음 정식종목이 된 e스포츠 게임의 선전이 눈에 띄었고, 신진서 9단을 비롯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남자 바둑 단체 종목 금메달 소식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기원’이라는 간판이 동네마다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아마도 PC방이 들어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997년 세계 처음으로 문을 연 명지대 바둑학과가 지난해 폐과를 선언한 사실은 바둑 시장 침체와 저변인구 감소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정진해 아시아를 제패한 바둑 국가대표 선수들의 끈기와 집념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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