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거듭하는 일본 고향납세] 연간 모금액 10조원 시대 눈앞…유연한 발상으로 판 키웠다
구체적 쓰임새에 국민들 공감
기업은 돈에 더해 인재도 ‘기부’
위성사무실 여는 곳도 증가세
도시엔 지자체 안테나숍 개설
인연 맺은 기부자들 발길 이어
존재감 적었던 지역 농산물도
답례품으로 개발되며 재부상
17년 전, ‘도시 근로자는 우리 고향이 길러서 내보낸 인력들인 만큼 그들에게 부과되는 세금 중 일부는 고향이 회수해야 한다’는 한 지방자치단체장의 엉뚱하면서도 참신한 발상에서 비롯된 일본 ‘후루사토 노제이(고향납세)’.
아이디어 제안이 있고서 약 2년의 사회적 논의와 입법화 과정을 거쳐 2008년 탄생한 고향납세는 이후 지속적인 보완과 함께 매년 성장을 거듭하면서 지방창생(우리의 지역 활성화)을 주도하는 핵심 제도로 자리매김했다. 도입 15년째인 2022년의 기부금 모금 실적은 무려 9650여억엔(약 9조원)에 달한다. 고향납세의 한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고향사랑기부제(고향기부제)를 올해 갓 도입해 아직 성장통을 겪고 있는 우리로선 여간 부럽지 않은 노릇이다.
연간 모금액 10조원 시대를 앞둔 일본 고향납세가 성공 가도를 달려온 비결은 무엇일까? 어떻게 국민적 지지를 얻으며 제도를 확장했을까? 또 지자체들은 기부금 유치를 위해 어떤 매력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하고 있을까? 도농상생국민운동본부(대표 정영일)의 일본 고향납세 현장조사에 동행해 그 진화상을 들여다봤다. 일본 중부 후쿠이현 사카이시, 도야마현 다테야마정, 나가노현 아난정 3곳의 모범 제도 5가지를 소개한다.
◆기부금 용처, 시민이 결정=인구 8만명의 사카이시는 고향납세 기부금의 사용을 시민이 결정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카이시가 속한 후쿠이현은 고향납세 창안자인 니시카와 잇세이(西川一誠) 지사가 재직한 곳이기도 하다.
사카이시는 기부금 사용 아이디어 모집부터 사업 선택까지 일련의 과정을 시민이 주도하는 기부시민참여제를 조례로 두고 있다. 기금 검토위원회에는 시민 대표 4명, 의회 대표 3명, 시 직원 2명이 참여하는데, 시민 대표로는 아이가 있는 부모, 가정이 있는 여성이 우선이다. 이 검토위원회를 통과한 안건은 시장도 존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진행한 사업들은 어린이 지킴이 유니폼 통일 사업, 장애인·비장애인을 포괄하는 놀이공간 설치, 지역 사적·자연경관에 문패·그림패 달기 사업 등 주로 생활 밀착형이다. 쓰임새가 구체적이다보니 기부자들의 반응도 좋다. ‘공감 가는 사업이 많다’ ‘직접 방문도 해보고 싶다’는 호평 속에 사카이시는 2022년 모금 실적 150억원을 기록했다.
◆인재파견형 고향납세=최근 일본 지자체들이 관심을 쏟는 기업판 고향납세의 공식 명칭은 ‘지방창생 응원세제’다. 기업이 내는 기부금의 90%를 법인 관계세에서 경감해주는데, 이 기업판 고향납세 중엔 ‘인재파견형’도 있다. 2020년 10월 도입된 제도로, 기업은 지자체에 돈이 아니라 인재를 지원한다.
전문 지식과 노하우를 가진 인재를 지자체에 파견해 지방창생을 촉진한다는 취지로, 기업은 파견 직원 급여분의 90%를 세금에서 공제받는다. 지자체는 별도의 인건비 부담 없이 우수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제도 시행 첫해 일본 전역의 인재 파견자는 102명이었다.
다테야마정은 도쿄에 있는 한 여행사로부터 직원을 파견받아 관광자원 활용, 호텔 운영 등에 큰 도움을 얻었다. 관계인구로 맺어진 그 직원은 회사 정년퇴직 후 다테야마의 주민이 됐으며, 현재도 이주·정주 컨설팅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점점 늘고 있는 안테나숍과 위성 사무실=고향납세제의 안착과 함께 지자체의 안테나숍(전략점포) 개설과 기업들의 위성 사무실(Satellite office·원격근무지) 설치도 꾸준히 느는 추세다.
현이나 지방의 좀 큰 도시들은 대부분 수도권에 안테나숍을 운영하는데, 사카이시의 안테나숍은 도쿄 시나가와구에 있다. 2018년 개설해 위탁 운영 중이다. 안테나숍의 장점은 고향납세를 통해 사카이시를 알게 된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식자재를 구매하고, 그들이 다시 기부자가 되는 선순환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사카이시에서는 매장 안내 아르바이트 요원도 사카이시 출신 대학생들을 선발해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위성 사무실은 기업판 고향납세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테야마정의 경우 기부한 한 회사에 유휴시설을 제공해줬고, 다테야마의 풍광에 반한 그 회사에서는 이곳을 원격근무지로 쓰고 있다.
◆블렌딩 통해 인기 답례품 된 산간지 쌀=아난정은 나가노현 남쪽에 있는 산간 지자체다. 규모는 작지만 한국어로 된 마을 안내서가 있을 정도로 지역 알리기에 열심인 곳이다.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심화된 지역 침체를 해소할 방법을 찾다가 고향납세에 착안했고, 고향납세 답례품 사업을 위해 ‘신슈아톰’이라는 사단법인을 개설했다. 아난정은 지역의 캐치프레이즈(표어)도 ‘연금 플러스(+) 50만엔’으로 정했다.
신슈아톰이 주력하는 분야는 그동안 물량이 얼마 안돼 존재감이 없던 지역 산간지 쌀을 고향납세를 통해 파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혼합미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쌀 블렌딩(적절히 배합하는 것) 기술도 등장했는데, 신슈아톰은 소량 다품목인 지역쌀을 자체 식미 테스트를 거쳐 정립한 블렌딩 비율(고시히카리 60%, 가제사야가 20%, 아키타고마치 10% 등)로 포장, 답례품으로 제공하고 있다. 밥맛 좋다고 소문이 나 답례품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구매하는 소비자도 많다. 단점이 장점이 된 셈이다.
◆유휴농지 해소하고 답례품도 생산하고=아난정 신슈아톰의 또 다른 핵심 사업은 영농 위임을 통한 유휴농지 해소다. 2017년 아난정 자체 조사 결과 최근 5년간 후계농·전입농이 전무했을 정도로 영농 종사자가 감소하며 농지 황폐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기간산업인 농업이 쇠퇴하니 경관보전과 치산치수 기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 해결에도 신슈아톰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2020년부터 논 보전을 위해 휴경 예정지 영농 대행에 나선 것. 논 주인에게는 10a당 1만엔 또는 쌀 1포대(60㎏)를 보상하는데, “경작지 형상을 유지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무상으로 논을 제공하는 주민도 많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생산한 쌀이 고향납세 답례품용으로 쏠쏠히 활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후쿠이·도야마·나가노(일본)=이승환 논설실장 lsh@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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