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희의 환경칼럼] 경악할 기온 상승에도 밤잠 편히 자는 ‘기후 딜레마’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2023. 10. 1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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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지구 기온 ‘역대 최고’보다 0.5도 높아
10년 상승치의 두 배 반
하지만 세계는 평온
해결책 없다고 아예 체념인가
‘도덕적 혼돈’ 상황
유럽 기후관측기구인 코페르니쿠스가 5일 발표한 보도자료에 들어 있는 1940년 이래 매년 일별 기온 그래프. 밝은 빨간색 선이 2023년 기온이다. 암적색은 연평균 역대 최고 기온이었던 2016년. 올 9월 기온은 역대 최고치보다 0.5도 상승했다. 회색 점선으로 표시된 것은 산업혁명기인 1850~1900년 평균치에서 1.5도 높은 선이다.

유럽 기후 모니터링 기구인 코페르니쿠스가 지난달 지구 평균 기온(섭씨 16.83도)이 역대 9월 최고치(2020년)보다 0.5도 높았다고 5일 발표했다. 기후변화는 10년마다 0.2도 올라가는 속도로 움직여왔다. 그에 비해 지난달은 경악할 수준의 널뛰기였다. 엘니뇨 요인만 갖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역대 최고치 경신’은 6월부터 넉 달째다. 미국 민간 기후관측 기구인 버클리어스에 따르면 7월 역대 최고치를 0.26도, 8월엔 0.31도 경신했는데 9월 다시 그 격차를 크게 벌려놨다. 산업혁명기(1850~1900년) 평균에서 1.75도 높았다. 지금 기세면 연간 평균치로도 파리협정 1차 억제 목표인 1.5도를 초과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이쯤 되면 세계가 긴박하게 돌아가야 할 것 같지만 평온하다. 주요 뉴스로 거론도 되지 않고 있다. 이런 무관심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선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중대형 승용차를 몰면 1㎞마다 이산화탄소를 200g 정도 뿜어낸다. 1㎞ 주행마다 두루마리 휴지 한 뭉치 정도의 쓰레기를 차창 밖으로 버린다고 생각해보라.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거라면 적어도 양심의 가책은 느낄 것이다. 이산화탄소에는 그런 게 없다.

기후변화는 사람 감각 주기로는 포착하기 힘들게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위협으로 느끼기가 힘들다. 기후변화의 결정적 영향은 수십 년, 또는 그보다 더 뒤에나 나타날지 모른다. 현 세대는 앞 세대들이 100년, 200년간 뿜어온 온실가스 때문에 생긴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위치다. 그런데 우리가 솔선해 어떤 불편이나 규제를 감수하면서 온실가스를 줄일 때, 그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 혜택은 손주들이나 또는 지금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후손들에게 돌아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런 거라면 우리는 앞 세대로부터는 피해를 입고, 후세대를 위해선 희생해야 하는 존재이다. 가족이나 이웃, 만난 적 있고 아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좀 양보해도 괜찮다. 그렇지만 생면부지의 먼 후세대를 위한 희생이라면 그 선택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기후변화는 수억, 수십억 세계인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기후 윤리학자 중에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있다. “나를 포함한 무수한 사람들이 각자 극미한 양을 더한 후 그걸 믹서기에 섞어 갈아버린 다음, 각자가 그중 극히 일부분을 떼어먹을 때 그 주스의 맛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 더구나 온실가스를 줄이는 고통은 우리 국민이 온전히 감수해야 하는 반면, 그에 따른 기후변화 억제의 이익은 전 세계로 분산된다. 혜택을 주로 받는 집단은 어디 먼 대륙의 이름도 모르는 나라 사람일 수 있다. 이웃 도시끼리 매립지, 소각로 갈등 하나 해결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200개 나라가 얽힌 세계가 각국 경제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문제에서 원만한 협조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온실가스 감축에 동참하는 것이 보장돼야 나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죄수의 딜레마다.

기후변화의 인과 흐름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많은 변수가 꼬리물기식으로 상호 엇물려 있다. 비행기 탈 때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수십 년 뒤 해수면 상승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과학 설명은 전문용어, 숫자, 그래프로 혼란스럽다. 정황 증거는 많지만 직접 증거는 드문 가설적 이론이 많다. 기후 얘기는 하도 비슷한 것을 많이 들어 이젠 진부해졌다는 ‘기후 피로증’도 있다. 사람들은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막막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아예 머리를 돌려 회피해버린다. 그것 말고도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은데 당장 닥칠 것도 아니라면 뒤로 미룰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미뤄두자는 것이다. 욕망 절제가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그건 사람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과연 가능한 대안인지 의문이다. 휴가 때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가는 화제로 들떠 있는데 어느 누군가 비행기 여행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니 절제해야 한다고 말을 꺼내면 분위기는 썰렁해질 것이다.

설문조사를 하면 기후 문제가 중요하다는 대답이 많이 나온다. 그건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누워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걱정일 수 있다. 사실은 기후 문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고 경고하는 기후 과학자들도 밤에는 평화로운 꿈을 꾸며 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후 붕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데다 온실가스는 알면서도 뿜어내는 것이라서 결국 윤리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도덕철학자 스티븐 가디너는 지금 상황을 ‘완전한 도덕적 혼돈(perfect moral storm)’이라고 했다. 기후변화를 ‘사악한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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