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라이벌이자 서로의 스승… 세리 위해 모였죠”
“안니카 소렌스탐과 캐리 웹은 제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늘 일깨워줘요. 현역 땐 더 열심히 연습하게 하였고, 지금은 골프의 미래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도록 해주는 최고의 스승이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능청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만담을 잘하던 ‘리치 언니(부자 언니란 뜻의 별명)’ 박세리(46) 모습이 아니었다. 두 눈에 ‘존경’이라고 써 붙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렌스탐(53·스웨덴)과 웹(49·호주)을 바라보며 최대한 자신을 낮추려 했다. 소렌스탐과 웹은 오히려 “우린 정말 세리를 존경(리스펙트)해요.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최초의 한국 선수이자 아시아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며 여자골프의 영토를 넓힌 개척자니까요”라고 했다. “여자 골프 인기가 남자보다 높은 유일한 나라가 한국 아니냐”며 웃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통산 72승을 거둔 ‘골프 여제’ 소렌스탐과 ‘여자 백상아리’라 불리며 41승을 올린 웹, 그리고 25승을 거둔 ‘한국 골프의 선구자’ 박세리는 모두 세계 골프명예의 전당 회원들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셋이 합해 138승을 거두며 여자골프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소렌스탐과 웹, 박세리가 지난 7일 부산 기장군의 스톤게이트 컨트리클럽에 모였다. 올해 2회째를 맞은 자선 이벤트 대회 ‘Maum 박세리 월드매치’를 위한 것. 마음 캐피털 그룹(MCG)은 미국 실리콘밸리 투자회사로 LS그룹 장손 구본웅 의장이 설립한 투자 회사다. 한류 콘텐츠 투자의 하나로 내년 3월 박세리 이름을 건 LPGA투어 대회 신설도 후원한다고 한다.
박세리 월드매치에는 이들 빅3 외에도 로라 데이비스(60·잉글랜드), 미셸 위(34·미국), 수잔 페테르센(42·노르웨이), 에이미 앨콧(67·미국), 청야니(34·대만) 등 해외 스타들과 박지은(44), 한희원(45), 김주연(42), 최나연(36), 김하늘(35), 그리고 국내 스포츠 스타인 이형택(47), 진종오(44), 박태환(34), 현정화(54), 이동국(44), 김택수(53), 모태범(34), 윤석민(37), 김승현(45), 윤성빈(29), 신수지(32) 등이 참가했다. ‘리치 언니’ 박세리의 국내외 인맥이 총동원된 것. 2인 1조로 짝을 이뤄 번갈아 샷을 이루는 포섬 방식을 했는데 최나연과 테니스 스타 이형택이 이븐파 72타를 합작해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한 최나연과 이형택 이름으로 스포츠·문화·예술 공존의 가치를 위한 기부처에 조성된 기부금 1억원을 전달했다.
소렌스탐은 현역 시절부터 한국에서 열린 LPGA투어 대회에 참가하고 국내에서 열린 박세리 이벤트 대회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올해는 소렌스탐이 3월에 먼저 연락을 해 지난주 주니어 골프 대회인 박세리&안니카 인비테이셔널 아시아도 개최했다. 소렌스탐은 “골프는 평생 기쁨과 고통을 함께 준 애증(love and hate)의 대상이었다”며 “골프를 통해 많은 걸 누린 우리는 서로 힘을 합해 세계 골프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했다.
웹은 현역시절부터 좀처럼 한국을 찾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전 한국을 찾았을 때 화장실 이용에 불편한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고 박세리가 귀띔했다. 이런 웹은 올해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에서 열렸던 US여자오픈에서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역대 US여자오픈 챔피언들의 이벤트 대회에 박세리, 줄리 잉크스터(63·미국)와 한 조가 된 웹은 라운드 중 박세리가 자신의 자선 대회 참석을 제의하자 “세리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가겠다”며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웹은 며칠 일찍 국내에 들어와 평소 연락을 주고받는 최나연 안내로 서울 여행을 하고, 박지은과 한국식 갈비를 즐겼다. 웹은 “한국이 참 멋진 나라라는 걸 만끽했다”며 웃었다.
현역 시절 셋은 서로 다른 개성의 카리스마를 지닌 지독한 선수들이었다. 소렌스탐은 대학시절부터 모든 샷을 컴퓨터에 입력하며 약점을 고쳐나간 완벽주의자. 한 라운드 54타를 치겠다는 ‘비전 54′ 목표 아래 하루 1000개씩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엄청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질 몸집을 키웠다. 여자 선수로는 유일하게 꿈의 59타를 기록했고, 남자대회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웹은 LPGA 사상 가장 뛰어난 볼 스트라이킹 능력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호주의 전설 그렉 노먼(68)이 웹의 스윙을 처음 보고는 “아름답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감탄했다. 박세리는 연장전 6전 전승이 말해주듯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 강한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소렌스탐은 2008년, 박세리는 2016년 공식 은퇴했다. 웹은 아직 은퇴를 하지 않았다. 웹은 “최근 대회를 거의 나가지 않지만, 나의 모든 것인 골프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며 “호주에서 더 많은 어린이가 골프를 접할 수 있도록 활동을 늘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호주 교포출신 프로골퍼인 이민지와 오수현, 그레이스 김 등은 주니어 선수들에게 세계무대를 경험하는 기회를 주는 ‘캐리 웹 장학금’을 받으며 성장했다. 웹은 “인구 8500명인 조그만 시골 마을 출신인 내가 골프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만났던 것처럼 더 많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부산에서 “세계 골프 발전을 위해 우리 셋이 더 끈끈하게 뭉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현역 시절 한 외신은 “박세리와 소렌스탐, 웹을 빼놓고는 LPGA투어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앞으로도 계속될 예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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