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가 망설이자, 이승만은 국군의 38선 돌파를 결심했다 [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를 따라 일본에 이르고 그 뒤엔 류큐 제도로 뻗는다. … 방어선은 류큐 제도에서 필리핀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대만과 남한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얘기였다. 뒷날 공화당 지도자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이 지적한 대로, 애치슨의 연설은 공산주의 세력이 두 나라를 “공격하라는 초대장”이었다.
애치슨의 초대에 응해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남한을 침공했다. 전력에서 크게 열세였던 한국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단 사흘 만에 수도를 적군에게 내주었다. 전쟁은 북한 수뇌부 계산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북한의 침공이 알려지자, 미국은 머뭇거리지 않고 한국을 도우려 참전했다. 어찌된 일인가? 애치슨 연설과 북한 침공 사이의 다섯 달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미국이 그렇게 단호하게 나섰는가?
애치슨의 ‘방어선 연설’이 있고 4주가 지난 2월 9일, 웨스트 버지니아의 작은 탄광 도시 휠링에서 여성 공화당원들이 연설회를 열었다. 연사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였다. 그는 냉전에서 미국이 계속 밀린다고 지적하고, 그런 사정은 미국 정부 깊숙이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첩자가 되어 미국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자로 확인된 국무부 관리 57명의 명단을 가졌다고 선언했다.
그의 연설은 청중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치열한 전쟁에서 분명히 미국이 이겼는데, 유라시아에선 소비에트 러시아가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보다 더 위협적인 적으로 등장한 상황에서 미국 시민들은 당혹한 참이었다. 특히 미국의 충실한 우방 중화민국이 갑자기 일어난 공산당 반군에 쫓겨서 대만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도움으로 선 남한의 대한민국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었다.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매카시는 명료하게 설명해준 것이었다.
그는 국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위험한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했다. 그들은 돈을 받고 군사 기밀이나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외교 정책을 미국의 적들에게 유리하도록 세우고 조정하므로, 미국의 안보와 이익이 근본적 수준에서 해를 입는 것이었다. 이른바 ‘영향력 첩자(agent of influence)’들이라는 얘기였다.
매카시가 중서부의 유세 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왔을 때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기한 의혹은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점으로 떠올랐다. 마침 해남도 싸움에서 중국 정부군이 중공군에 패퇴해서 대만으로 철수하자, ‘누가 중국을 잃었나?(Who lost China?)’ 논쟁이 미국에서 거세게 일었다. 애치슨의 국무부로 의혹의 눈길이 쏠렸고, 트루먼 대통령과 민주당은 공산주의 세력의 득세를 불렀다는 비난을 받았다.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궁지로 몰린 트루먼으로선 선택 여지가 없었다. 6월 26일 트루먼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극동의 해군과 공군이 한국에 개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27일엔 대만의 중화민국을 중공군으로부터 지키려고 7함대를 대만으로 보내고, 베트남에서 공산당 게릴라들과 싸우는 프랑스에 군사 원조를 가속한다고 발표했다.
이런 극적 반전은 매카시 혼자 이룬 것이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시민들이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그의 통찰과 용기에서 비롯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세평과 무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강직하고 청렴하고 용기 있는 정치가였다. 설령 그의 적들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악평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두 나라 시민들은 그에게 오직 경의와 감사만으로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빚을 졌다.
38선 돌파 명령
미국이 참전하기로 결정했을 때, 유엔은 북한군의 침공을 “평화의 침해”에 해당된다고 선언하고 유엔 회원국들에 북한군을 물리치는 데 참여하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미군은 유엔의 깃발을 들고 참전했다.
한국에 들어온 첫 미군 부대는 24보병사단 21연대 1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400명 남짓한 병력이었다. 이들은 7월 5일 경기도 오산 북쪽의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싸웠는데, 미군 포대 한 곳의 지원을 받았다.
첫 싸움에서 미군은 기본 대전차 무기인 2.36인치 로켓포가 북한군의 전차를 격파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이어 북한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양익 포위를 시도하자, 미군은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양상은 미군이 거듭 시도한 지연전에서 되풀이되었다. 결국 8월 4일에 주한 유엔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낙동강 남쪽에 최후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Pusan Perimeter)’을 설치했다. 이 방어선은 왜관을 기점으로 삼아 북동쪽은 국군이 맡고 남서쪽은 미군이 맡았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미군과 한국군이 맞은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예비 병력 부족이었다. 거의 모든 부대가 전선에 투입되어, 위급한 상황에 투입할 만한 예비 병력이 거의 없었다. 워커 사령관이 고안한 대책은 ‘소방대(fire brigade)’였으니, 위험해진 전선에 투입되어 ‘불을 끄는’ 임무를 특정 부대에 부여한 것이었다. 존 마이클리스 중령이 이끈 25사단 27연대가 소방대로 활약했다. 낙동강 싸움에서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싸움’에서도 ‘마이클리스 소방대’는 북한군 전차 부대들을 격파해서 한국군 1사단의 승리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는 사이, 유엔군은 9월 중순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단숨에 뒤집었다. 9월 하순에 유엔군이 서울을 회복하자, 남쪽으로 진출한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겼다.
9월 23일 오전 4시 30분, 미군 1기병사단의 선두 ‘린치 임무 부대(Task Force Lynch)’가 상주 낙동리 나루에서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원래 인천상륙작전의 핵심 작전 개념은 상륙 부대인 미군 10군단이 북한군의 퇴로를 끊으면, 낙동강을 지키던 미군 8군이 공격에 나서서 북한군을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한강 남안에서 기다리는 10군단의 ‘모루’에 떨어질 8군의 ‘망치’의 머리가 바로 린치 임무 부대였다. 9월 27일에 린치 임무 부대가 오산에 닿아서, 두 부대가 연결되었다. 이렇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면서 유엔군은 38선으로 진출했다.
당시 유엔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합동참모본부에서 ‘중공군이나 소비에트 러시아군이 개입할 위험이 없으면 북한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미국 국방부는 북한 진격을 주장했지만, 전쟁 확대를 겁낸 국무부는 반대했다. 지침의 모호성은 이런 의견의 분열을 반영했고, 맥아더는 북한 진격을 유보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부터 북한 진격을 주장해온 터였다. 북한이 먼저 침공한 이상 38선은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맥아더가 망설이자, 이 대통령은 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부산 경무대로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과 참모들을 불러 전투 상황을 들었다. 그러고 정 장군에게 ‘38선 돌파에 관한 지령’을 건넸다.
정 장군은 강릉으로 진격하던 1군단을 찾아 군단장 김백일 준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38선에서 멈추면 지형적으로 불리해서 38선 이북에서 꼭 확보해야 할 지형지물”이 있는가 물었다. 김 군단장은 지도를 살피고 나서 양양을 확보하려면 38선 바로 북쪽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정 장군은 워커 사령관을 찾아 사정을 설명하고 38선 바로 북쪽 고지를 점령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정 장군은 김 군단장과 함께 동해안 3사단 23연대를 찾아가서 연대장 김종순 대령에게 북진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인 10월 1일 23연대는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른 국군 부대들이 서둘러 38선을 넘었다.
그래도 미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맥아더 원수가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을 했다. 바로 그날 중화인민공화국 외상 주은래는 “제국주의자들이 무도하게 중국 인민들의 이웃 국가의 영토를 침공하면 중국 인민들은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0월 3일엔 인도 대표가 ‘유엔군은 38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 사이에도 국군은 빠르게 진격했고 북진의 운동량은 커졌다. 한국군에 공을 빼앗기게 된 미군의 불평은 커졌고, 맥아더 원수는 북한 진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10월 9일 1기병사단은 평양을 바라고 북진길에 올랐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
6월 30일. 대전으로 남하한 뒤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모젤 권총 한 자루를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 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야”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8월 14일.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는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 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얘기할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찼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무초는 입이 굳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단호히 말했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1950년 8월 초순 전황이 위태로워지자,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는 워커 장군에게 낙동강 방어선 후방에 제2 방어선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워커는 공병 장교인 개리슨 데이비드슨 준장에게 그 일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나온 ‘데이비드슨 선(Davidson Line)’은 울산 북쪽에서 밀양을 거쳐 마산 동북쪽으로 연결되었다. 유엔군이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해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경우, 이 선은 부산항을 통한 철수 작전을 엄호할 터였다.
무초 대사가 제주도에 망명 정부를 세울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줄곧 한국군의 역량을 낮춰보면서 패배주의적 행태를 보여온 미국 대사를 질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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