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반성문

조갑룡 교육인 2023. 10.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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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룡 교육인

‘시인과 농부’라는 찻집에 두 친구가 앉았다. A가 B에게 질문한다. “프란츠 주페 아나?” B는 머쓱한 표정이다. “‘시인과 농부’ 서곡을 작곡한 사람이다.” 이번에는 B가 묻는다. “양자역학 설명할 수 있나?” A는 태연하게 “모른다”고 대답한다. 인문학을 교양의 핵심으로 받드는 시류(時流)를 말해준다.

일본의 대표지성 다치바나 다카시는 “현대의 교양은 도스토옙스키나 실존철학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고 뇌과학”이라 일갈(一喝)했다. 과연 문(文)·사(史)·철(哲)이 이 시대의 핵심교양이어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과학도인 필자는 창의·융합이라는 명제 앞에서 잘난 척 인문학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고 다녔다. 인문교양 우월주의(優越主義)에 혹(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한다.

우리의 인문에 대한 선호는 어떻게 된 것일까? 가까이는 근대 이후 우리나라 ‘교양’의 개념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는데 그 의미와 수용의 맥락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특권적 지위를 누린 일본 동경제대(東京帝大) 학생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던 인문교양주의는 우리나라의 경성제대(京城帝大)에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입신출세(立身出世)에 대한 반성(안티테제)에서 등장했지만 강한 엘리트주의를 담고 있었다. 오히려 입신출세의 세속적 노골성을 완화해 주는 문화적 장신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문독서와 인문교양의 지나친 강조, 서양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배 등은 수양과 자아성찰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과시욕으로 자리 잡아갔다. 한때 그럴듯한 거실을 장식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세계사상전집 등이 그것이다. 더욱이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해야 한다’는 스티브 잡스 프레젠테이션의 휴매니티(humanities)와 리버럴 아트(liberal arts)를 통째로 ‘인문학’으로 번역해 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온통 인문학에 함몰되었다. 리버럴 아트는 인문학 사회학 예술 자연과학 등을 포함하는 인문과 자연의 동행(同行)을 의미하는데도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묘비명은 ‘하늘엔 빛나는 별, 내 마음엔 도덕률’로 줄여 쓰기도 한다. ‘하늘의 별’은 오묘한 조화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계를 상징한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심연(深淵)을 본 철학자이다. 자연을 보는 관점에 일대 혁신을 가져다준 뉴턴 물리학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철학에도 이러한 전환을 이루려 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과학은 사실 영역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도덕적 가치와 실존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칸트의 통찰은 달랐다. 자연과학은 사실과 진실, 즉 인간의 실존과 가치에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지구역사 45억 년에는 ‘지구의 탄생, 생명의 탄생, 인공지능의 탄생’이라는 3대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론, 인공지능과 양자역학이라는 주사위 놀이는 칸트의 사유(思惟)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어느 시점에서 진화의 경로가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우연이 확률적으로 모여 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 앞에서 겸허해진다. 이게 인간 실존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해석이자 가치이다. 양자역학은 어떤 무엇이 동시에 이것(파동)과 저것(입자)이 될 수 있다고 과감히 선언한다. 어떤 것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숨통을 틔워준다.

더하여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행성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천문학자의 눈은 나와 우리를 넘어 ‘우주’로 확장된다. 지구에서 61억 ㎞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0.21화소에 불과한 창백한 푸른 점 지구, 저 작은 픽셀에서 미미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품었던 오해와 증오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자연과학은 반성하게 해 준다.


세상을 이끄는 담론과 가치가 교양이라면 아무래도 자연과학의 통찰이 이 시대의 핵심교양이어야 할 것 같다. ‘공유결합(共有結合)’이라는 찻집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보편적 교양으로서 회자(膾炙)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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