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0개 노후 단지 ‘전기차 충전기 설치’ 속앓이
최근 재건축을 기대하는 노후 아파트 주민들이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전기차 충전기’ 설치 문제다. 준공한 지 30~40년 이상 된 아파트에선 여름철이면 엘리베이터 운행 홀짝제가 시행되고 정전까지 발생하는 등 전력 부족이 일상화돼 있다. 전국에 노후된 전력 장비(3㎾ 미만)를 쓰는 아파트, 연립주택 등은 전체 공동주택의 3분의 1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 사용이 많은 전기차 충전기 설치 여부가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변압기 등 장비를 교체하면 된다. 하지만 전력 장비를 교체할 경우 시설 개선에 해당해 재건축 심사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원하는 주민과 집값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주민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다르다 보니 쉽게 해결되지 않고 주민들 사이 반목만 커지고 있다. 이는 충전기 기피와 인프라 부족을 심화시켜 전기차 판매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벌금 내더라도 충전기 설치 안 돼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전력 사용 설계량을 가구당 1㎾(킬로와트)로 계산해 준공됐다. 그러나 에어컨·전자레인지·식기세척기 등 전자 제품 수와 종류가 크게 늘어 현재는 가구당 전력 사용량이 3~5㎾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아파트, 연립주택 등 전국 공동주택 2만5000여 단지의 32%인 7900여 단지의 세대별 설계 용량이 3㎾ 미만이다. 이들 중 일부는 전력 수요가 집중되는 시기 정전을 겪는 경우도 많다. 최근 5년간 6~8월 여름에 발생한 공동주택 정전 사고는 연평균 248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게 전기차 충전기다. 2021년 개정된 친환경자동차법 시행령에 따라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도 2025년 1월까지 전체 주차 면적의 5%(2022년 1월 28일 이전 건축 허가받은 곳은 2%) 이상에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해야 한다.
변압기 용량을 큰 것으로 바꾸면 전력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만, 이는 노후 아파트 주민들의 최고 관심사인 재건축 승인을 불리하게 만든다. 국토안전관리원의 ‘재건축 사업 안전 진단 매뉴얼’에 따르면 전기 통신 시스템, 장비 및 배선 노후도 등은 재건축 진단 평가 항목에 포함된다. 변압기를 새것으로 바꾸면 시설 개선에 해당해 감점 요인이 되는 것이다. 준공 40년가량 된 서울 A 아파트 관리소장은 “재건축 사업시행인가를 받으면 예외 조항을 적용받아 충전기를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며 “(최대 3000만원인) 강제 이행금을 내고라도 충전기를 설치하지 않고 일단 버티겠다는 주민이 많다”고 했다. 세대별 설계 용량이 3㎾ 미만인 단지가 7900여 개인 점을 감안하면 단지당 100여 가구로만 쳐도 거의 100만가구가 ‘전기차 충전기 논란’에 휩싸여 있는 셈이다.
◇“재건축 언제 될지 모르는데”
전기차 차주들은 재건축 대상으로 선정되는 일이 만만찮고 실제 사업시행인가를 받았다 해도 퇴거 등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불편을 감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노후 아파트에 사는 전기차 차주 이모씨는 “전기차는 충전이 느린데 공공장소에서 하려니 시간 낭비가 배로 커진다”며 “법이 정하는 만큼도 설치를 안 하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전기차 차주들이 선호하는 고속 충전기는 꿈도 꾸기 어렵다. 서울시의 경우 완속 충전기 10대당 고속 충전기 1대를 설치하라고 규정하지만, 급속 충전기는 전력 사용이 더 커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한 전기차 차주는 “재건축뿐 아니라 주차 문제로도 충전기 설치가 어려워 갈등을 겪고 있다”고 했다.
반면 전기차를 소유하지 않은 주민들은 “전기차 충전이 대부분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주택 전력 사용 패턴과 정확히 일치해 전력 부하를 가중시킨다”고 주장한다. 대한전기학회에 따르면, 공동주택 내 전기차 충전은 오후 5시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차의 경우 사용하는 전력량이 적은 것도 아니다. 전기차 1대의 1일 평균 주행거리인 37.8㎞를 기준으로 했을 때 현대차 아이오닉5 1대가 한 달에 사용하는 전기량은 1인 가구의 월평균 전기 사용량과 맞먹는다.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위해 변압기 등 설비 교체를 결정했어도 비용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5000만원가량 하는 공사 비용은 한전과 정부가 80% 지원하지만, 나머지 20%는 주민들이 내야 한다. 전기차가 없는 주민 입장에선 재건축 불발 위험을 감수하고 사용하지도 않는 비용까지 내는 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은 “집값 영향을 이유로 전력 설비가 개선되지 않고, 전기차 충전기 기피 현상이 생기면 전기차 판매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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