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한 송이 종이꽃 피우는 데에도 1년 정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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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지화(紙花)도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거 아세요?”
지난 5일 진관사의 지화 전시회 ‘자비의 향기, 꽃으로 피어나다’ 개막식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종이로 만든 꽃도 시간이 지나면서 습도 등의 영향을 받아 눅눅해지고, 쭈글쭈글해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진관사 입구 한문화체험관에서 19일까지 열리는 전시회를 보러 가면서 ‘AI시대에 사람이 손으로 종이를 접어서 꽃을 만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습니다. 1년 내내, 한겨울에도 생화(生花)가 나오는 시대, 3D프린터로 못 만드는 게 없는 시대, 플라스틱 조화(造花)를 진짜 꽃처럼 만드는 시대 아닙니까. 종이꽃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생화나 플라스틱 조화보다는 덜 생생할텐데,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막상 눈으로 보고나니 생화, 조화와는 다른 지화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 세계는 한 마디로 ‘스토리’였습니다. 우선 정성이었습니다. 진관사의 지화는 수륙재(水陸齋)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 즉 세상을 헤매는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입니다. 진관사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국행수륙재를 지내온 사찰입니다. 당시로서는 귀한 종이를 행사 때마다 왕실에서 1000장씩 받았다고 합니다. 진관사 수륙재는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요. 진관사 수륙재는 올해도 지난 9월 3일부터 10월 22일까지 매주 일요일에 열리고 있습니다.
이 수륙재를 비롯한 불교 의례 때 쓰이는 꽃이 지화입니다. 꽃은 부처님 당시부터 불교에서 의미있는 공양물이었지요.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깨달음을 뜻하고, 화엄경에서도 이 세상을 온갖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라고 하지요. 수륙재에 지화를 쓰게 된 이유는 생화를 쓰게 되면 생명을 해쳐야 하기 때문이었답니다. 지금이야 4계절 내내 생화를 구할 수 있지만 과거엔 그러지 못했으니 종이로 꽃을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중요한 의식에 쓰이는 꽃이니 정성을 들였겠지요. 진관사는 사찰 음식으로도 유명하지요. 사찰 음식도 수륙재를 비롯한 불교 의례에 사용하는 음식을 계속 만들면서 전통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수륙재를 이어오려는 노력으로 음식과 지화의 전통이 이어졌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종이 염색부터 완성까지 꼬박 1년 걸리는 지화
저는 ‘지화 제작에 1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 놀랐습니다. 어릴 때 어버이날 만들던 ‘종이 카네이션’ 정도로 생각했던 저로서는 종이꽃이 1년이나 걸린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더군요. 설명을 들어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지화 제작의 1단계는 염색입니다. 진관사는 지금도 한지 염색을 직접 한다고 하네요. 주요 색깔은 쪽(파란색)과 치자(노란색)랍니다. 진관사 스님들은 쪽과 치자를 직접 재배한다고 합니다. 치자의 경우는 전(煎)을 노란색으로 부칠 때에도 쓰이지요. 진관사에서는 음식을 준비할 때 쓰고 남은 치자물을 종이 염색할 때 쓴다고 하네요. 생화를 쓰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보호하고 음식에 쓰고 남은 치자물을 염색에 재활용한다니 ESG나 환경을 중요시하는 요즘 시대에 딱 맞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토리’의 보고(寶庫)인 셈입니다. 전시작 중에는 ‘부들’이 있었습니다. 부들 색깔은 갈색이지요. 이 갈색은 어디서 나왔는가 봤더니 소나무 껍질을 빻아서 만들었더군요. 그러면 연꽃잎을 비롯한 이파리의 녹색은 어떻게 만들까요? 천연의 어떤 식물에서 녹색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알고보니 답은 간단했습니다. 우리가 초등학생 시절 ‘색(色) 섞어 만들기’에 답이 있더군요. ‘검정색+흰색=회색’ ‘파란색+빨간색=보라색’ 그리고 ‘노란색+파란색=녹색’의 방식입니다. 실제로 스님들은 녹색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쪽물을 들여 파란색 염색을 한 후에 다시 치자물에 담가 녹색을 만든다고 합니다. 진관사는 경내에 방앗간을 두고 떡도 직접 만드는 등 웬만하면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쓰는 사찰입니다. 닥나무까지 경내에 재배하면서 종이를 만들었다면 ‘지화’ 한 송이를 피우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요.
지화 제작의 시작이 염색이라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지화 제작 과정이 모두 1년이 걸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진관사 앞 한문화체험관 3층에 진열된 작업도구와 작업과정을 동영상을 보니 그또한 이해가 됐습니다. 전시된 작업도구엔 두꺼운 도마와 끌, 갖가지 모양의 가위가 있었습니다. 개막식 참석자들이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진관사 주지 법해 스님이 꽃무늬가 그려진 종이 위에 끌을 대고 망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꽝, 꽝’ 내리쳤지요. 그러자 20~30겹으로 겹쳐있던 한지가 꽃무늬 모양으로 잘렸습니다. 이 종이들이 꽃잎이 되는 겁니다. 그 후의 과정도 지난했습니다. 종이를 겹겹이 주름지게 접었다가 다시 펴서 봉오리를 만들지요. 그 과정을 ‘작봉’이라고 부르더군요. 작봉 과정을 거치면 우담바라, 연화, 다리화, 작약, 국화가 피어오르는 것이지요. 진관사에서는 이 다섯 가지 꽃에 부들을 더해 6종의 종이꽃을 만들고 있습니다. 꽃 모양에 따라, 각 단계에 따라 쓰이는 칼의 종류도 모두 달랐습니다. 가볍게 ‘종이 카네이션’의 진화된 형태 정도를 떠올렸던 제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가 깨닫게 됐습니다.
연구소 만들어 스님들과 회원 50명 전통 계승
진관사지화장엄연구소는 1999년 현 주지 법해 스님이 만든 단체 ‘지화회’가 뿌리입니다. 법해 스님은 “40년 전 진관사에 왔을 때에도 큰 의례가 있을 때면 장인(匠人)들이 와서 지화를 만들곤 했다”며 “스님들이 직접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2020년엔 이 단체가 ‘진관사지화장엄’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천연염색과 제작기법, 재료와 도구, 문헌 연구 등으로 분야를 확대했지요. 현재는 스님뿐 아니라 불자(佛子) 등 회원이 50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1년 동안 종이를 염색하고 접고 자르고 붙여서 종이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시는 진관사 입구 한문화체험관에서 19일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의 하일라이트는 3층 중정(中井)에 설치된 ‘극락세계 연지’. 종이로 만든 연꽃으로 작은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연꽃은 지금 피고 있는 중이어서 꽃잎이 덜 펴졌고, 어떤 꽃봉오리 속에는 ‘왕생자’ 즉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난 동자가 있습니다.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심청이가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스토리를 연상시키지요.
의례 마친 후엔 태우는 것이 마지막 순서
지화와 관련해 이런 저런 스토리를 듣던 중 가장 감명 깊은 것은 ‘종이꽃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진관사지화장엄연구소장 도운 스님은 “의식을 마친 다음 지화는 소(焼), 즉 태운다”며 “정성을 들여 만든 지화를 태워서 청정함으로 돌아가는 순간,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고 말했습니다. 전시를 보니 1년 내내 만든 작품을 태워서 무(無)로 돌려보내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이 됐습니다. 이날은 전시 개막 때 테이프도 염색한 한지였습니다. 참석자들은 가위 없이 손으로 한지를 끊어 ‘커팅’했습니다.
진관사 스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수륙재를 지내고 사찰음식 그리고 종이꽃을 만들고 있을까요?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과 지화 모두 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 때 먹는 사람의 평화를 기원하듯이 꽃을 만들 때에도 부처님 마음을 담아 만들려고 애씁니다. 음식과 지화 모두 손이 기억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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