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구를 먹는가…쌀쌀한 날 뜨끈한 김치칼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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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마 같은 가을비가 내리는 수요일 오후, 평소 흠모하는 작가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김치가 들어가면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친구가 나눠준 비건 김치로 냉장고가 가득할 때 김치 요리를 좋아하는 손님이 오다니! 나는 그 말을 듣기 전부터 김치전을 부칠지, 김치칼국수를 끓일지 고민했기 때문에 이 만남이 몹시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새콤하고 개운한 김치칼제비를 호호 불며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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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마 같은 가을비가 내리는 수요일 오후, 평소 흠모하는 작가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함께 먹은 모든 음식이 기억난다. 처음에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파는 커리를 먹었고, 그다음엔 내가 만든 떡볶이, 세 번째는 청국장, 가장 최근 만남에선 파스타와 알배추구이를 먹었다. 채식이란 점 말고는 공통분모가 없는 메뉴 선정 탓에 음식 취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초대를 저질렀는데, 만나기 바로 직전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게 됐다.
“김치가 들어가면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친구가 나눠준 비건 김치로 냉장고가 가득할 때 김치 요리를 좋아하는 손님이 오다니! 나는 그 말을 듣기 전부터 김치전을 부칠지, 김치칼국수를 끓일지 고민했기 때문에 이 만남이 몹시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상관없는 각각의 사건이 연결된 인과처럼 보였다. 살짝 고백하자면 나는 사소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버쟁이고 툭하면 운명을 느끼는 미신쟁이가 맞는다. 식물성 식단이 더 친환경적이라는 과학적 근거보다 동물을 해치면 벌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말자. 매일 죽이지 말자. 강제로 태어나게 하지 말자. 이런 말들을 하기 위해 숫자를 나열하기보다 동화를 쓰고 싶은 사람이다. 비이성적인 채식주의자로 보일까봐 아닌 척할 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남의 살을 먹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 내장부터 껍데기까지 죄다 먹는 식성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제든 신선한 동물의 사체를 살 수 있는 현실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죽고 사는 문제보다 내 입맛이 더 중요했으며 야식 메뉴 선정 같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다. 불교에서는 죄지으면 축생으로 환생한다고 믿는데 어쩌면 나부터 돼지나 닭으로 환생할지도 모르겠다.
“칼국수가 좋으세요? 수제비가 좋으세요?”
이미 칼제비를 끓이면서 물었다. 이 정도 독단은 선택의 고민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배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행히 작가님은 둘 다 좋다고 했다. 냄비 가득 김치와 호박을 썰어 넣고 버섯가루로 감칠맛을 냈다. 칼국수와 수제비를 함께 넣고 8분 정도 끓이면 속은 쫀득하게 익고 국물은 걸쭉해진다.
무엇을 먹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지만 요리된 상태 자체는 ‘무엇’이 아니다. 칼국수면 어떻고 수제비면 어떤가. 결국엔 밀가루 조각이다. 다듬고 익히기 전, 살아 있었을 때 무엇이었느냐를 봐야 한다. 우리 감각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기에 언제라도 손질된 살점에서 한때 살아 있었던 동물을 느낄 수 있다. 듣고자 하면 심장 소리가 들리고, 보고자 하면 순수한 얼굴이 보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누구를 먹고 있는가.
창밖에 푸르게 내리는 비, 쌀쌀할 때 먹는 뜨끈한 한 그릇. 새콤하고 개운한 김치칼제비를 호호 불며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다가올 미래처럼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가님이 돌아가는 기차를 놓칠 뻔했다. 출발 시간 1분을 남기고 뛰어가는 뒷모습을 배웅하며 잠시 있다가, 기차에 탔다는 문자를 받고 집으로 향하는 시동을 걸었다.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일 말고는 다 사소하게 느껴지는 수요일이었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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