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와 평화 위해 ‘영원한 청년 운동가’로 사셨죠”
한신대 나와 70년대부터 빈민 사목 미 유학 시절엔 이민자 인권 운동 익산 YMCA 때는 ‘여성의 전화’ 설립 2011년 사단법인 고양평화누리 세워 고양포럼 월례토론회 100회 이끌어 투병 중에도 평화운동가학교 만들어
경기도 고양의 ‘영원한 청년 활동가 최준수 목사’가 10월6일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1948년생이니 겨우 75살에 말이죠. 목사님은 1973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잠시 중학교 교사를 지내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서울 창신동에 청암교회를 세워 담임목사로 지내며 빈민 봉사모임 ‘한벗회’를 만들고 봉제공장 여공들을 위한 야학당을 운영했습니다. 판자촌에 천막을 치고 빈들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위한 ‘아가페의 집’도 세웠습니다. 1970-80년대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하면서 가장 밑바닥 생활을 했던 넝마주이들을 섬기기도 했답니다. 그 시절 200여 명의 대원들을 거느리던 넝마주이 대장이 장례식에 참석해 목사님과 지낸 세월을 회고한 것은 너무 감동적이더군요. 그도 목사로 변신해 지금 여주에서 목회를 한다니까요. 고인은 1980년대 말 미국에 건너가 온갖 험한 일로 돈 벌며 드류대학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가난한 동포를 위한 ‘좋은 이웃 봉사회’를 설립하고 차별 당하는 다문화 이민자들을 위한 인권운동에도 앞장섰답니다.
1994년 박사학위를 받고 1995년 귀국해 이듬해 익산 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마침 저도 1994년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1996년 원광대 교수로 자리 잡으며 둘이 처음 만났습니다. 그 무렵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통받는 북녘동포 돕기운동에 동참하면서요. 목사님과 제 나이 차이가 7년이나 되는데, 둘 다 몹시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상고를 나와 미국에 유학해 같은 해에 박사를 받고 같은 해에 서로 타향인 익산으로 옮겨 가장 가까운 통일운동 동지가 됐으니 재미있는 인연이지요.
목사님은 익산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와이엠시에이를 부흥시키고 차별 당하며 고통받는 여성을 돕기 위한 ‘익산 여성의 전화’를 설립했습니다. 빈민과 장애인 봉사단체들도 다시 정비했고요. 그리고 제가 1999년 6월 서해교전을 계기로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을 시작하자, 익산의 종교인, 의료인, 사업가, 시민운동가 등 20여명의 운영위원을 모아 이끌어주었습니다. 북녘 사람들을 형제동포보다는 원수로 여기고 적으로 삼는 살벌한 정치와 사회 풍토에서 빨갱이로 눈총받으며 통일운동 벌이는 게 쉽지 않지만, 목사님의 원만한 성품과 낭만 덕분에 1만명이 1만원씩 1억원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시민운동도 재미있고 즐겁게 해야 오래 지속할 수 있다며 강연회에든 모금운동에든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로 흥을 돋우는 바람에 거칠고 과격한 제 말과 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줄어들었겠지요. 연세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에서 피아노를 반주하던 사모님이 목사님의 기타치고 노래하는 모습에 반해 연애하고 결혼했을 정도니까요.
회갑을 넘기고 2010년 고양으로 옮긴 뒤엔 더 정열적으로 활동했습니다. 2011년 사단법인 ‘고양평화누리’를 만들고 월례토론회 ‘고양포럼’을 12년 이상 꾸준히 운영해 지난 9월 100회를 기록했습니다. ‘평화도시 연구소’를 세우고 ‘평화센터’를 여는 등 다양한 조직과 운동을 끊임없이 만들고 이끌더군요. ‘고양 종교인평화회의’도 주도했기에 목사님 추모 및 환송예배에 신부와 스님이 조사를 낭독하고 교무도 참석했고요. 몇 해 전 병을 얻었지만 일에 매달리다 작년에야 좀 쉬고 싶다며 저에게 휴양할만한 곳을 부탁하더니, 끝내 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올해 통일평화운동가 양성을 위한 ‘고양평화학교’를 시작하면서 저에게 교장을 맡겼습니다.
지난 8월 결혼 50주년을 맞아 오스트레일리아로 금혼여행을 다녀왔으니 아마 신혼여행 후 처음이자 마지막 부부여행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이미 건강을 잃었기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겠지만요. 이러한 목사님에게 ‘고양신문’은 지난달 ‘아름다운 시민상’을 수여했고, 그의 평생친구 백진앙 한벗재단 이사장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남겼습니다. “최준수 목사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고,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느라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세상을 떠났다.” 저 세상에서는 부자로 편안하게 살아보길 기원하며 아우이자 동지 이재봉 드림.
이재봉 남이랑북이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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