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글쓰기와 현장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글쓰기와 현장’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삶을 디자인하는 학교 타이포그라피대학 파티(paju typography institute) 학생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 글의 배경이 된 곳, 작가가 머물렀던 공간, 작가를 기념하는 공간 등을 답사하는 수업이다.
만약 시인의 얼굴, 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얼굴이 아닐까? 윤동주문학관에서 솔이 낮게 말했다. 덕분에 우리는 낡고 오래된 사진 속 시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윽한 기품과 맑은 기상이 깃든. 시인의 글씨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오가 시인의 육필원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단정하고 섬세하지만 견결한 글씨. 붉은 펜으로 정성스럽게 고쳐 쓴 교정지 속 시인의 필체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 서울 부암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은 작고 소박하지만 잠시 세속의 번다함을 벗어나 시적 영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문학관을 나와 우리는 시인의 언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시를 낭독하고 누군가는 기억에 남는 사진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북간도가 어디야?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라고 ‘별 헤는 밤’에 쓰잖아. 북간도 서간도 만주가 어디쯤인지 모르겠어. 오가 말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펼쳐보았다. 조선 국경 바로 너머네. 역사책이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인데 모호하고 짐작이 안 되는 지역이었어. 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 이후에 사람들이 이주했겠지.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졌던 곳이고 실제로 일본과 무장투쟁을 벌이던 사람들의 근거지이기도 했고. 준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시에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였네.
우리는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을 가로지르던 시인의 행로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했다. 한반도와 중국과 일본이 하나의 길이었던 시절, 그 모오든 하늘에 빛나던 별이 시인의 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 별빛이 오늘 우리 마음 위로도 총총 떠올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게 할 것이다. 어쩐지 마음이 울렁울렁해요. 지가 말했다.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을 방문한 날은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의 야외수업이 번거로울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심우장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더없이 고즈넉하고 아늑했다. 우리는 한 시절 시인이 머물던 방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그곳에 앉아 시를 읽었다. 그런데 만해는 시인이자 스님이었잖아요. 스님이 어째 이리 키쓰에 집착했을까요? 만해 시에는 키쓰라는 말이 완전 자주 등장하잖아요. 여가 웃음을 물고 말하자 모두 어 그러네, 이 스님 딴생각이 많으셨네, 농이 오갔다. 키쓰라는 말에 집착한 게 아니라 매혹됐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키쓰라는 말이 전에 없던 말이거든. 조선 사람들이 키쓰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도 저 말은 서양의 소설이나 글이 들어오면서 알게 된 낯선, 몹시도 생경한 어감이었을 거 같아. 시에서 어떤 긴장을 요할 때 사용했던 말이 아닐까? 내 설명에 학생들의 표정이 쫑긋해졌다.
만해가 살던 당시엔 새로운 말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온 시대이기도 했지. 기차, 수도, 우체국, 공장, 전화기, 레코드, 전보, 테니스, 자동차, 구락부, 야구, 페미니즘, 사회주의, 볼셰비키…. 인류의 사고실험과 근대의 문물이 언어와 함께 그야말로 전 조선으로 밀려들던 시기였지. 키쓰라는 말을 단순히 입맞춤이라는 의미보다는 어쩌면 근대와 전근대, 서양과 동양, 식민지와 제국주의, 성과 속, 그 경계의 긴장과 불안을 상징처럼 드러내는 말로 쓰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 말을 솔이 받았다. 아하, 그러니까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블록체인, 유전자가위, 가상현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챗지피티 같은 말이기도 했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도 어떤 전환의 시점에 서 있는 거 같아요. 존재와 비존재가 서로에게 침범하는. 그런 시기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솔의 질문에 연이 벽에 걸린 만해의 글씨를 가리키며 느릿느릿 답했다. 시를 쓰며, 폭압에 저항하며, 구도의 길을 걸으며. 우산을 받치고 내려오는 길에 지가 말했다. 친구들이 시를 낭독하는데 어쩐지 눈물이 났어요. 아, 왜 매주 수요일엔 마음이 울렁울렁해질까요?
‘독립운동열전’을 읽은 날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났다. 그곳에는 김상옥 의사 동상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들었어요.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못 했을 거 같아요. 고문과 취조, 감옥살이. 너무 무섭고 끔찍했어요. 대단하지만 나는 할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의 말은 독립운동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을 촉발했다. 총을 들고 격렬하게 싸우는 전투, 의열단처럼 친일 매국노나 일본의 군국주의 수뇌부를 암살하는 일,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은행 털기, 라면 학생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뒷바라지하는 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 부상당한 사람을 간호하는 일,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 이라면? 조심조심 힘을 보탰을 거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고개를 주억주억했다. 기록하는 일,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싸우다 죽어갔는지, 그들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기록하고 전승하는 일, 이라면? 해야지요, 학생들은 입을 모았다. 만약 독립운동이 고통스럽고 어렵기만 했다면 그토록 오래,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그토록 끝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아는 한 독립운동은 무엇보다 새로운 꿈을 꾸는 일이었다. 독립운동의 목표는 일제의 폭압을 물리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난 그 자리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 그 새로운 비전을 설계하고 기획하고 건설하는 일이었다. 계급이 없는 나라, 여자와 남자가 다 같이 배우고 일하는 나라, 가난과 차별을 없앤 평등하고도 평화로운 나라, 그 빛나는 시간에 대한 열망으로 사람들은 기꺼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 여성단체를 만드는 일, 독서회를 조직하는 일, 그 모오든 일이 독립운동이었을 것이다. 아, 가슴이 울렁울렁해지네요. 이번에는 나비였다. 우리는 어쩐지 기개가 넘쳐 발걸음도 씩씩하게 김상옥 의사 루트와 종로경찰서 일대와 여성독립운동가의 길을 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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