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군과 간도특설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함석헌이 눈물을 훔치며 책을 쓰던 그 일제강점기가 아무리 폭압적이었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고난의 시기, 수난의 시기였던 것은 아니다. 일제의 편에 붙어 식민지 민중을 수탈하는 데 자신을 바친 마름들에게는 살 만한 세상, 심지어 영화로운 세상이었다. (…)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함석헌이 말한 대로 역사는 “예언이자 심판”이다.
중세 기독교 신학의 길을 닦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10권에서 기억의 놀라운 힘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억의 드넓은 방에는 내가 겪은 것, 느낀 것, 생각한 것, 요컨대 나의 모든 과거가 모여 있다. 기억이 없다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기억은 내 혼이고 나 자신이다.” 기억이야말로 나를 나로 만들어 주는 “알 수 없는 두려운 신비”다. 기억이 있으므로 나는 희망을 품을 수 있고 희망에 기대어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억이 무수한 ‘나’를 관통해 전체를 이루면 집단의 기억이 된다. 그 집단의 기억이 역사다. 역사, 곧 집단적 기억이 없다면 집단을 지탱해 주는 정체성이 생겨날 수 없고 정체성이 없으면 집단은 집단으로서 존속할 수 없다. 역사가 집단을 집단으로 만들어 준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지녔던 첫번째 인간으로 꼽힌다.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i)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에 맞서 그리스의 자유를 지켜낸 승리의 기록이자 서양의 역사적 정체성 형성에 뿌리가 된 역사서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역사책은 미토스(신화)의 세계를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세대 뒤 인물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이르러서야 신들의 입김은 역사의 배후로 물러났다. 투키디데스는 신화적 요소를 걷어내고 엄정한 사실로써 역사적 사태의 인과관계를 밝혔다. 헤로도토스가 호메로스의 흔적을 간직한 과도기의 역사가라면, 투키디데스는 사실들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 한 최초의 진정한 역사가다. 두 사람이 서술한 역사의 방향과 색조도 크게 다르다. ‘페르시아 전쟁사’가 영광의 기록이라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패배의 기록이다.
투키디데스는 왜 패배의 역사를 썼는가. 그 까닭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말한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이 유용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해 일회용 들을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다.”
이 문장에 투키디데스의 역사관 혹은 역사의식이 집약돼 있다. 역사는 비슷한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나간 일을 바르게 알아 교훈을 얻어야만 유사한 사태가 닥쳤을 때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두 강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27년간 싸움이 아테네의 처참한 패배로 끝난 전쟁이다. 그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미래에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그 미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썼다.
그렇다면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패배한 원인을 어디서 찾았을까? 전쟁의 향배를 좌우한 수많은 원인 가운데 투키디데스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인간의 오만과 무분별이다. 아테네인의 무분별한 오만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커졌다. 전쟁 4년째에 일어난 미틸레네 정벌과 10여년 뒤 벌어진 멜로스섬 학살이 오만의 자기증식을 보여준다.
기원전 428년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는 함대를 보내 봉기를 진압했다. 아테네에 반기를 든 미틸레네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민회가 열렸다. 과격한 선동정치가 클레온의 부추김을 받은 아테네인들은 반란에 가담했든 하지 않았든 가리지 않고 미틸레네인들의 씨를 말리기로 결의했다. 그 명령을 실은 배가 미틸레네로 떠났다. 미틸레네의 씨를 말리다니 그래도 되는가? 밤사이 그런 자기 의심이 퍼져 나갔다. 이튿날 다시 민회를 연 아테네인들은 전날의 ‘잔인하고 분별없는’ 결의를 뒤집었다. 하루의 간격을 두고 새 명령을 실은 함선이 미틸레네로 질주했다. 현지 아테네 장군이 첫번째 명령을 막 집행하려는 순간, 두번째 명령이 도착해 집단학살을 막았다.
그러나 12년 뒤 에게해의 조그만 섬 멜로스가 저항했을 때,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분별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테네인들은 이 작은 나라가 아테네에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영토를 약탈하고 짓밟았다. 멜로스가 아테네에 맞서기 시작하자 아테네는 대표단을 보내 나라를 통째로 바치거나 전멸을 감수하라고 요구했다. 투키디데스는 건조한 문장으로 아테네 대표단이 멜로스인들에게 하는 말을 전한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멜로스인들은 보편적인 이로움의 관념에 호소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원칙이 여러분에게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귀국이 넘어졌을 때 어떤 보복을 당할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테네 대표단은 그런 가정에는 관심이 없다고 쏘아붙였다. ‘아테네에 호의적인 중립국으로 남겠다’는 멜로스인들의 타협안도 거부했다. 대표단이 돌아가자 아테네 군대는 멜로스를 파괴한 뒤 성인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잡아 노예로 팔았다.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오만은 1년 뒤 시칠리아 원정으로 이어졌고 이 무모한 원정에서 아테네 제국의 붕괴가 시작됐다. 투키디데스는 냉정한 서술 속에 역사를 보는 자신의 관점을 새겨넣었다. 독자는 투키디데스의 시선을 따라가며 오만이 아테네의 몰락을 재촉했음을 읽어내게 된다.
20세기 한반도의 격동과 비극도 ‘영구 장서’가 될 만한 역사서를 남겼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인 1930년대에 쓴 책이다. 이 책은 투키디데스의 암시적 서술과 달리 역사관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함석헌은 몽골 침략 시기를 서술하던 중 이렇게 토로한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대로 또 모아내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이 역사를 가리켜 함석헌은 ‘고난의 역사’라고 부른다. 고통과 수난으로 이어져 온 역사가 우리 역사다. 함석헌은 그 누추한 역사가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세계의 각 민족이 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있는 게 가난과 고난밖에 없구나 할 때 천지가 아득하였다. 애급과 바빌론은 문명의 시작이라는 명예를 가졌고, 중국은 도덕을, 그리스는 그 예술을, 로마는 그 정치를 가지고 가겠지만 한국은 무엇을 가지고 갈 터인가?” 그 부끄러움 속에서 함석헌은 ‘역사의 뜻’을 본다. 고난에는 분명히 뜻이 있으리라는 얘기다. 함석헌의 ‘뜻’을 다를 말로 풀면 ‘역사의식’이 될 것이다. 그 역사의식이 집단기억의 방향을 결정한다.
함석헌이 눈물을 훔치며 책을 쓰던 그 일제강점기가 아무리 폭압적이었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고난의 시기, 수난의 시기였던 것은 아니다. 일제의 편에 붙어 식민지 민중을 수탈하는 데 자신을 바친 마름들에게는 살 만한 세상, 심지어 영화로운 세상이었다. 이 마름들의 후예에게도 역사의식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식이라고 해서 모두 동급의 역사의식은 아니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함석헌이 말한 대로 역사는 “예언이자 심판”이다. 무엇을 심판하고 무엇을 받드느냐에 따라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이냐?’는 물음의 답도 달라진다. 역사의식이 뒤틀리면 미래의 역사가 뒤틀린다.
나라와 동포를 팔아넘긴 자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뉴라이트’ 집권 세력의 집요한 역사 바꿔치기 작업은 세상이 바뀌면 또다시 나라를 바치고 큰 나라의 마름 노릇을 하겠다는 집단 고백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엔 자존의식도 자기긍정도 없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국가를 이끌면 나라 전체의 윤리의식이 저열해진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니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힘이 정의를 대체하고 각자도생이 생존의 법칙이 된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않은 나라, 역사의 참뜻을 묻지 않는 나라는 들개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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