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테트리스하는 기분” 한글로 그린 동식물만 400편… ‘우리말 사랑꾼’ 선정
“비속어로 불리는 동식물, 명칭 바꿔야 멸종 막아”
“3년 전 이맘때였죠. 반달가슴곰 사진에서 귀를 보고 문득 자음 ‘ㅂ’과 모양이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한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9일 오전 본지와 만난 진관우(24) 작가는 한글로 그린 혹등고래와 호랑이, 검은머리물떼새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한글 단어만으로 동식물을 그려내는 ‘한글 화가’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만 400점이 넘는다. 태블릿PC나 휴대폰으로 그리는데, 작업에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1달까지 걸린다고 한다. 지금은 동료 12명과 함께 생물 다양성에 대해 대중에게 알리는 ‘숨탄것들’ 프로젝트의 대표를 맡고 있다. ‘숨탄것들’은 목숨을 타고난 것들이라는 뜻으로 생명을 가진 동식물 전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진 작가가 생물 다양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지난 2019년 봄이었다. 당시 서울대공원에 우연히 방문해 비버 우리 앞에 있었는데 동물원을 찾은 5명의 산악 동호회원이 비버를 가리키며 “이게 수달인데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와 우리 생태계를 망친다니까”라고 말한 것을 듣고 진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비버를 보고 수달이라고 하면서 뉴트리아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으니 생물 다양성에 대해 더 잘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진 작가는 한글 단어로 그림을 그리면서 한글의 예술적인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영어와 달리 10개의 모음이 모두 직선 형태라서 동물의 작은 털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는 “영어의 모음들은 다 동그랗지만 한글 모음은 전부 직선 모양이라 세밀화를 그리기에 적합하다”면서도 “‘여우원숭이’처럼 둥근 자음이 많은 동물의 털을 구현할 때는 골치가 아프기도 하다”며 웃었다.
한글은 영어와 다르게 각 글자가 균일한 폭과 크기로 되어 있어, 한글로 그림을 그리면 마치 테트리스를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고 한다. ‘소’는 세모(△) 모양, ‘맑’은 네모(□) 모양과 비슷해 글자들이 퍼즐처럼 맞물리는 게 장점이라는 것이다.
진 작가는 한글로 동식물을 그리면서 한글과 생태계가 닮은 점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고 한다. 그는 “‘밤’이라는 글자에서 ‘ㅂ’만 없어져도 글자의 뜻을 전혀 알 수 없지 않느냐”며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종이 멸종하면 구조적으로 유지되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생물 다양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지난 7월 북극도 직접 다녀왔다. 그는 “여우, 순록, 바다코끼리, 퍼핀 등 멸종 위기에 빠진 동물들을 직접 만났는데, 특히 턱수염물범을 본 기억이 뭉클하게 남아있다”며 “녹아가는 북극 빙하 위에 위태롭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서 멸종위기종을 더 잘 알리고 지켜나가야 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3년 넘는 기간 동안 한글로 그림을 그려온 진 작가는 한글날인 지난 9일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2023 우리말 사랑꾼’ 표창을 받았다. 그는 “우리 주변 동식물 중에는 벙어리뻐꾸기나 문둥이박쥐처럼 비속어나 장애인 비하 표현으로 불리는 이들이 809종이나 있다. 이런 동식물은 이름 때문에 매체에 노출되기도 어렵고, 연구도 잘 안 돼 멸종 위기에 처했는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관심 밖으로 밀려난 동식물의 이름을 바꾸고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더욱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바다에 뜬 둥근 부표에 동식물을 대륙 모양으로 그려 넣어 해양 생물 보호에도 관심을 갖고 싶다”며 “그림책까지도 출판해 한글과 생물 다양성 모두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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