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혼자만의 과오 아냐” ‘세기의 심판’ 낱낱이 기록한 전범재판 기념관[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뉘른베르크편④]
“나치, 히틀러 개인만의 과오 아냐”
미국 주도·극소수 기소 한계 있지만
전범 끈질긴 추적 중…2년 전에도 재판
[헤럴드경제(뉘른베르크)=박혜원·김빛나 기자] 독일 바이에른 주 뉘른베르크 외곽에 위치한 지방법원 600호 법정. 이 법정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1월부터 218일에 걸쳐 나치 고위 전범을 대상으로 1차 국제 군사재판(이하 전범재판)이 열렸던 장소다. 지난달 18일 오후 600호 법정을 방문했다. 하나둘씩 시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매일 이곳에서 상영되는 전범재판 상설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전범재판 당시 현장을 알기 위해 평일 오후 시간대임에도 20여 명이 방청석에 자리했다. 법정 불이 꺼진 뒤 내려온 스크린에 70여 년 전의 현장이 흑백 영상으로 펼쳐졌다. 영상에는 피고인 전범 21명의 실명과 죄목이 함께 명시됐다. 그러나 정작 피고인들의 얼굴은 무표정해, 사뭇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와 관련 베르너 피더러 독일 연구단체 ‘모두를 위한 역사(Geschichte Für Alle e.V.)’ 소속 연구원은 “피고인 모두 자신은 죄가 없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혼자 계획했고 본인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사형을 선고 받은 12명마저도 실제 집행이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독일 나치 정권의 어두운 역사는 결코 히틀러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기념관의 주된 취지다. 피더러 연구원은 “현재 독일 사회에서 나치 정권이 히틀러 혼자만의 과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600호 법정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재판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협소함’이다. 피고인 전범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듯 이는 역설적으로 세계 최초의 전범 재판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 악셀 피셔 전범재판기념관 소속 연구원은 “재판 과정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을 정도로 관심이 커 법정은 늘 덥고, 시끄러웠다”고 했다. 실제 재판 때마다 법정을 채운 인원은 피고인과 판사, 언론인, 통역사까지 500여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뉘른베르크가 전범 재판 장소로 채택된 건 법정 인근에 당시 독일 유일의 독방 수감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수감된 이들은 자살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전범 처벌에 있어 단호했던 독일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념관 3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장에는 당시의 치열했던 논의 과정이 더욱 자세하게 기록됐다. 1943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영국·소련 연합국 대표는 독일의 주요 전범들을 처벌하기로 합의하고, 2년 뒤인 1945년 포츠담 합의를 통해 이를 다시금 확정했다. 같은 해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국제법적 근거가 되는 ‘유럽 추축국 주요 전쟁범죄자 기소 및 처벌에 관한 협정 및 국제군사법원 헌장(뉘른베르크 헌장)’을 채택했다.
뉘른베르크 헌장은 ▷전쟁을 공모한 죄 ▷평화를 침해한 죄 ▷전쟁 범죄(살인, 강제노동 등) ▷반인권적 범죄(유대인 혐오 등)라는 4가지 처벌 기준을 수립했다. 이에 공군 총사령관 등을 맡았던 나치 정권 2인자 헤르만 괴링, 나치 국방부 원수였던 빌헬름 카이텔 등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기념관에선 이밖에 반유대주의 신문 ‘돌격대(Der Stürmer)’를 창간해 반인권적 침해 항목으로 기소된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등 생소한 이름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기의 재판’이라 불리는 나치 전범 재판에도 한계는 있었다. 우선 나치 고위 전범을 대상으로 한 1차 재판 기소자가 21명에 불과했다. 5500만명에 달했던 전쟁 사상자와, 광범위한 기소 기준을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규모다.
이후 1949년까지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열린 2차 재판 때 기소된 인원도 185명에 그쳤다. 피더러 연구원은 “(기소인은) 더 많았어야 한다”며 “전후에 정치적으로 서독을 부흥시키기 위해,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상황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사회에 복귀했다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 당시 독일 시민들 역시 냉소적이었다. 피더러 연구원은 “피고인들부터가 죄를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재판 결과를 믿지 않고 대부분 ‘페이크(fake)’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실제로 전범 피고인들 중 사죄의 뜻을 표한 이도 없었다. 피더러 연구원은 “나치 독일 군수부 장관이자 건축가로 알베르트 슈페어(징역 20년)만이 ‘유감스럽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며 그나마 ‘사죄 비슷한 것’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이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고 덧붙였다.
독일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바뀐 건 지금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1990년대 무렵이다. 독일 통일과 함께 사회적 세대 교체가 이뤄진 시점이다. 피더러 연구원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부모 세대를 향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재판장을 찾는 이들도 늘면서 뉘른베르크 시는 현재까지도 재판장으로 사용되는 이곳을 지난 2010년 기념관으로 조성했다. 재판이 있는 날 외에는 누구나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 뉘른베르크 헌장에 담겨 무엇이 전쟁 범죄를 구성하는지를 결정하는 ‘뉘른베르크 원칙’을 연구하기 위해 전 세계 법학계에서 이곳을 찾기도 한다.
이밖에도 나치 전범 처벌은 미국 주도로 진행됐다는 점 등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전범 재판에는 뚜렷한 시사점이 있다. 바로 ‘끈질김’이다. 나치 전범재판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마지막 재판은 2021년이었다. 독일 이체호 지방법원은 지난 2021년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비서로 일했던 90대 여성에게 1만 건 이상의 살인을 방조하고 교사한 혐의로 2년 징역형과 2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셔 연구원은 “독일에 어두운 역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저항해 독일 사회가 (청산을 위해) 노력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라고 강조했다.
〈독일편〉
[1] 뉘른베르크편
-인류역사의 수치를 공개하다
[2] 베를린편
-역사 전쟁 없는 도시
〈국내편〉
[0] 근현대사 유적지도
[1] 당신이 모르는 6.25
[2] 잊힌 친일 문화잔재
[3] 누구의 것도 아닌, 적산
[4]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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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nn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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