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칼럼] 자존심이 느껴지는 대법원장 후보 지명했으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3. 10. 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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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정상화'의 본질은
좌우교체가 아니라
사라진 권위를 되찾는것

국회가 대법원장 후보를 부결시켜 재판과 사법행정에 지장이 초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균용 전 대법원장 후보가 깜냥 있는 인물이었다면 안타까움은 배가되었겠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그렇지 않았다.

표결 하루 이틀을 앞두고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국회의원들에게 일일이 뿌렸다는 '대법원장 후보자 설명자료'를 보고 놀랐다. 의혹에 대한 변명보다 자화자찬이 인상적이었다. "후보자는 법조인이 된 순간부터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간다'는 소박한 정의감을 품고 이를 지키기 위한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1990년 법관으로 임용된 후 33년 동안 법과 원칙에 따라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 63쪽 자료는 대부분 이런 톤의 자랑과 해명, 읍소 그리고 사법 공백을 걱정하는 언론 보도 갈무리(무려 14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다.

장담컨대 대입 자소서도 이런 식으로 쓰면 낙방한다. 이 자료를 법원행정처 단독으로 작성한 것인지 이 전 후보자가 감수를 봤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표결 하루 전 직접 발표한 입장문도 수준은 비슷했다. 재산신고 누락 등에 구구절절한 해명을 한 뒤 "저에게 대법원장으로 봉직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며 낮은 자세로 봉사하고 헌신…"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의 몸부림에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본다는 '진인사대천명'의 성실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성실함으로 인해 사법부의 존엄과 교양인의 체면이 훼손되고 말았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가 다른 한 축인 입법부를 향해 이렇게 비굴할 수는 없다. 그는 법의 제사장이 되겠다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 자신을 앞세울 때, 그리고 허물을 인정할 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그의 격을 보여준다. 균형 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내뱉지 않는다. 그것은 초인적, 종교적인 덕성이다.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며' 살 것을 다짐하지도 않는다. 어떤 인간도 그렇게 살 수 없다. 절제가 결여된 말과 글은 헤픈 정신세계의 증거가 된다. 이 전 후보자가 엘리트 판사이자 손색없는 법 이론가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러나 대법원장에 어울리는 안정감과 균형감, 교양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대법원장은 높고 영예롭고 조용한 자리였다. 그 신비주의가 깨진 것은 문재인 정부 시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과 대법원 재판을 '거래'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혐의는 다툴 여지가 한두 구석이 아니고 지금도 다투어지고 있지만 대법원의 뒤꼍 풍경이 일반이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고고하지만은 않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후임인 김명수 사법부에 이르러 판사들은 웰빙이었고 재판은 지연됐으며 재판장은 배석판사 눈치를 보고 반(反)엘리트들이 득세했다. 대법원장의 개인적 권위, 제도로서의 사법부 권위가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다. 권위주의가 아니라 권위가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 정상화' 범주에는 당연히 사법부 정상화도 포함될 것이다. 좌경도된 대법원 구성을 우쪽으로 돌려놓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 교체는 될 수 있어도 '이게 정상'이라고 말할 것은 아니다. 정상화는 사라진 사법부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 권위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판사 개인이 직업적 자존심을 인식하는 것, 일보다 웰빙을 우선하거나 자신의 세계관을 법리에 앞세우는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문화가 되면 권위는 회복된 것이다.

사법부 권위 회복의 첫걸음은 대법원장에 어울리는 인물을 그 자리에 지명하는 데서 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성실함과 비굴함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절제된 언어가 체화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본인의 자존심이 사법부 구성원의 자존심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노원명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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