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힘 있는 말은 간명하다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는 소파에서 등을 떼고 내 말을 경청했다. 군 복무 중 포상휴가를 받아 아버지 회사에 들렀을 때다. 비서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전에 없이 내 말에 관심을 보이자 신나서 여러 얘기를 했다. 아무나 포상휴가를 받지는 않는다. 비록 일등병이지만 군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주로 하는 일은 군의 작전계획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자 더는 말할 게 없었다. 휴가 중에 쓸 용돈이나 얻으러 들렀으나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말을 마치자 아버지가 “네가 말하려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도 못 했다.
아버지는 “삶은 전쟁이다. 집이 아닌 내 삶의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찾아왔으면 특별히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다. 네가 한 말은 전장에서 할 게 아니다”라고 야단쳤다. 이어 아버지는 “목적 없는 말은 힘이 없다. 힘없는 말은 맥쩍다. 힘 있는 말은 간명하다”라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최고 브리핑은 송요찬 수도사단장이 전쟁 중 미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아이젠하워에게 한 영어 브리핑을 꼽는다”라고 예를 들었다.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송 사단장의 전황 브리핑은 이랬다. “이게 대한민국 지도입니다. 이쪽이 일본과 접한 동쪽, 중공과 접한 이쪽이 서쪽, 소련과 맞댄 북이 중공군과 남으로 침공했습니다. 각하가 있는 곳은 여깁니다. 적과 대치한 여기가 38선입니다. 현재 아군 사기는 100%, 계속 진군 중입니다.”
아버지는 “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 해야 한다. 브리핑은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며 “아이젠하워는 브리핑을 받고 송 장군에게 ‘내 군 생활 중 가장 잘한 브리핑이다’라며 칭찬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당시 기사를 검색해보니 사실이다. 기사는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1952년 11월 21일, 수도사단의 전방 지휘소인 백석산 정상에 도착해 수도사단장으로부터 전황을 청취하고, 한국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한국군의 용기를 칭찬하고, 승리를 위해 미국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아이젠하워의 방문은 한국군의 전투 의지를 높이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약속대로 미국의 한국 지원 확대로 이어졌고 한국군의 전투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언론에 공개된 그 날 영어 원문브리핑 내용은 아버지 설명과는 조금 차이가 났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극찬을 받은 송 사단장의 브리핑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잘 짚어낸 것으로 평가했다. 기사는 이어 ‘당선자는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그의 약속은 전쟁에 지친 한국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라고 논평했다.
아버지는 이어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거두절미(去頭截尾)’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빼고 핵심만 취한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나온다. 진(秦)나라 재상 이사(李斯)가 보고 중에 한비자(韓非子)의 법치주의 논리를 설명하려 하자 진시황이 이를 제지하고 본론만 말하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라! 머리와 꼬리를 떼어버리고 핵심만 취하라! 너희들은 법을 알면서도 어기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처벌받을 것이다.” 진시황은 일찍이 한비자의 저서를 읽고 크게 감동해 중용하려 했으나 동문수학한 이사가 모함해 그를 자결하게 했다.
아버지는 “중요한 말은 빼놓고, 군더더기만 늘어놓다 보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놓쳐 버리기 쉽다. 부연설명만 길게 늘어놓으면 듣는 사람이 곧 싫증 내고 만다. 핵심이 되는 요소만 짧고 명확하게 뜻을 전달해라. 그만큼 효과적인 말도 없다”고 했다. 이어 “인간의 주의 집중 지속시간은 평균 25분이지만, 5분 넘는 말은 경청하지 않는다. 주의력이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말에 간명성을 갖춰라. 주의를 집중시키고, 상대의 관심을 끌고, 논리적인 사고를 유도해야 한다면 귀납법이어야 한다”고도 주문하며 “인생도 마찬가지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간명하게 해야 한다”며 마무리했다. 도망치듯 문을 나섰다. 밖에서 아버지의 큰소리를 다 들었을 직원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포상휴가였어도 결국 집에 들르지 못했다.
아버지가 지적한 간명성은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인성이다. 간명성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제 뜻을 표현해 말을 하기 시작하는 손주에게도 꼭 물려줘야 할 소중한 품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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