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권과 싸우는’ 아집이 망쳐놓은 내년 예산안 [아침햇발]

정남구 2023. 10. 1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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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윤석열 정부 예산안]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남구 I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6월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치 권력이라면 선거에서 지더라도 나라를 위해 건전재정,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재정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8월29일 내년도 예산안을 의결하는 국무회의에서는 ‘재정 만능주의와 선거 매표 예산을 배격하고, 정치 보조금과 이권 카르텔 부분을 삭감하는 등 23조원의 지출 구조를 조정했다’고 밝혔다. ‘재정 건전성’을 무엇보다 우선하겠다는 결기를 읽을 수 있는 발언들이다.

재정적자를 줄이고, 국가부채 비율 상승을 억제한다는 이런 정책방향은 “문재인 정부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했다”는 대통령선거 때의 공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전히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데, 실제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했나? 그렇다고 볼 근거는 사실 희박하다.

코로나 위기 대응 과정에서 세계 주요국이 큰 폭의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2021년 말 국가부채비율을 2019년과 비교하면 일본은 26.2%포인트, 캐나다 25.7%포인트, 미국 29.4%포인트, 영국 18.9%포인트, 프랑스 15.1%포인트 상승했다. 제조업 강국 독일이 상대적으로 낮은 10.74%포인트 올랐고, 우리나라는 9.2%포인트 올랐다. 윤 대통령은 이런 수치를 아직도 보고받지 못한 것일까?

세계 주요국이 국가부채 비율 급증을 감수하고 그렇게 대응한 이유가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2020년 12월 내놓은 ‘경기침체와 사망률: 글로벌 관점’이란 논문이 이를 잘 설명한다. 논문은 1961년부터 2018년까지 180개국의 패널 데이터를 이용해 ‘경기침체와 사망률의 관계’를 분석한 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이 하락하는 해에는 주로 신흥 시장과 개발도상국에서 사망률이 증가하며, 특히 어린이 사망률이 증가한다. 선진국에서는 사망률이 약간만 증가한다. ‘경기침체의 상처 효과’는 몇년 동안 지속되며 경기침체가 깊어질수록 사망률이 더 크게 증가한다. 반면 호황기나 완만한 성장기는 사망률의 현저한 감소와 관련이 없다. 코로나19 경기침체의 영향을 무시할 경우 팬데믹으로 인한 최종 사망자 수가 과소평가될 수 있다.”

이 논문이 나오기 전에도 ‘경기침체의 상처 효과’가 알려져 있었다. 경기 상황을 무시한 채, 무작정 ‘재정 건전성’만을 강조하는 논리를 시대착오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그러나 눈과 귀를 꼭 막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윤석열 정부 경제팀 인사들의 귀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정부는 올해 경기가 ‘상저 하고’가 될 것이라 낙관하며 10개월을 보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8월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세수결손이 심각하니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서라도 정부지출을 늘려야 하지 않느냐는 야당의 지적에, “경제성장률을 0.1~0.2%포인트 높이기 위해 재정을 쉽게, 방만하게 빚을 내면서 대응할 상황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건전재정’이란 아집에 갇혀 민생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다. 8월 고용동향을 보면, 36시간 이상 취업자가 100만명 줄고, 36시간 미만 취업자가 131만3천명이나 늘었는데 가볍게 보아 넘기기 어렵다. 8월 소매판매액지수는 작년 같은 달보다 4.8%나 줄었다. 경기 회복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9일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1.1%로 낮춰 전망했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선 아집이 더 심해졌다. 명목성장률을 4.7%로 내다보면서 정부지출 증가율은 2.8%로 낮췄다. 초긴축이다. 정부는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비롯한 전쟁이 오래가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국제통화기금은 세계경제 성장률이 작년(3.5%)보다 올해(3.0%), 올해보다 내년(2.9%)에 더 낮을 것이라고 10일 내다봤다. 정부는 우리나라 내년 성장률을 2.4%로 내다보고 있지만, 국제통화기금은 2.2%로 낮췄고, 국회 예산정책처는 2.0%로 낮추는 등 하향 조정이 이어지고 있다. 민생은 제쳐두고 아직도 ‘전 정권과 싸우는’ 아집이 만들어낸 초긴축 예산, 이를 위한 마구잡이 예산 삭감이 우리 경제에 어떤 상처를 남길지 걱정이 크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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