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룩이는 걸음으로…‘집념’이 만든 21세 안세영의 금메달[플랫]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어요.”
믹스트존을 지나는 안세영(21·삼성생명)은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딛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시상대에서 내려올 때도 조심스럽게 한발씩 내디뎌야 했고, 평지도 절룩거리며 걸었다. 그런 부상도 아시아 정상을 향한 ‘세계 1위’의 집념을 꺾진 못했다.
안세영이 오른 무릎 부상을 이겨내고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챔피언에 올랐다.
세계랭킹 1위인 안세영은 지난 7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빈장체육관에서 끝난 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서 천위페이(중국·세계 3위)에 2-1(21-18 17-21 21-8)로 승리했다. 한국 선수의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우승은 역대 두 번째이자 1994년 히로시마 대회 금메달리스트 방수현 이후 29년 만의 대기록이다. 안세영은 단체전 우승에 이어 대회 2관왕에 등극했다.
안세영의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5년 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빚어지기 시작했다. 배드민턴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된 뒤 처음 나간 국제종합대회에서 안세영은 1회전 탈락했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언니들을 줄줄이 이기기만 해왔던 안세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상대는 4살 언니 천위페이(25·중국)였다. 안세영은 너무 어렸고 천위페이는 전성기로 가고 있었다.
그 뒤로 안세영은 스스로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훈련했다. 재미있게 노는 친구들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보면서 문득문득 부러운 마음도 셔틀콕으로 날려보냈다.
사실상 첫 실패였던 아시안게임의 기억은 3년 뒤 도쿄올림픽에서도 이어졌다. 8강에서 또 천위페이를 만났고 안세영은 또 탈락했다. “엄마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셨는데, 있나보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4전 전패 중이던 천위페이에 5패째를 당한 안세영은 경기 뒤 믹스트존에서 그렇게 아주 잠시 좌절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된 거면 더 열심히 해야 되는 거겠죠?”라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딱 1년 반 뒤, 세계 무대를 완전히 제패했다. 지난 3월 최대 메이저대회 전영오픈 결승에서 천위페이를 꺾고 우승한 뒤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모두 ‘방수현 이후 최초’의 역사를 새로 썼다. 7월 세계랭킹 1위에 올랐고 8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아예 남녀 통틀어 최초의 단식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 과정에 모두 ‘천적’ 천위페이가 있다. 올해만 9번 만나 안세영이 7승을 거뒀다. 1승8패였던 상대전적을 불과 9달 만에 8승10패로 만들었다. 안세영이 최고로 가는 길에는 숙명처럼 천위페이가 늘 있었고, 그를 이기겠다는 투지는 최고로 가는 길을 닦아주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전은 안세영의 배드민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될 경기다. 5년 간 별러왔던 승부를 이겼기 때문이다. 1게임에서 ‘뚝’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무릎을 다쳐 2게임을 내주고 3게임을 따낸 극적인 승리는 응원하던 국민에게 희열을 안겼다. 승리 뒤 “2게임 패배는 전략이었다”는 고백으로 얼마나 영리한 승부사인지도 보여주었다. 무조건 끝까지 뛰겠다는 투지가 있었기에 접전으로 상대 체력을 소진시킨 뒤 3세트를 일방적으로 따낼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귀국한 안세영은 무릎 힘줄이 파열돼 2주에서 최대 5주 재활이 필요하다고 진단받았다. 그 무릎으로 그렇게 뛰면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정신력의 저편에는 인생 목표인 금메달에 대한 의지와 함께 천위페이와의 승부를 향한 근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안세영이 준 크고 새로운 감동은 그가 이제 겨우 스물 한 살 어린 선수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안세영은 2002년생이다. 실제로 배가 고파가며 ‘헝그리 정신’으로 운동한 옛 세대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안세영이 태어난 그해 거스 히딩크 축구대표팀 감독이 한·일월드컵에서 사상 첫 16강에 오르고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새 ‘헝그리 정신’이 유행했지만, 안세영처럼 이렇게 온몸으로 몇 년 동안 일관된 모습으로 증명해낸 어린 선수는 거의 없었다.
인기종목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던 야구 대표팀은 최근 몇 년 투지라고는 찾기 어려운 모습으로 부진한 결과를 내 비난을 받았다. 세대와 환경 변화 속에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냉소적인 시선도 있었다. 모두가 몇 년씩 열심히 노력해 나가는 대회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온 종목도 있다. 대회 승패와 메달 색깔이 결국 병역 특례라는 특별한 혜택으로 귀결되고 집중되는 모습을 이번 대회 뒤에도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안세영의 특별한 이야기에 모두가 귀기울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2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안세영의 아시안게임 금메달 스토리는 마치 과거 스포츠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극적이고 꽉 차 있다. 인생의 목표 중 하나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위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5년 간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그 천위페이를 또 길목에서 만나, 일방적인 상대 응원 속에서 부상까지 당했지만 오로지 이기고 말겠다는 투지와 정신력으로 목표를 이뤄냈다.
안세영은 “무릎 쪽이 많이 아팠다. 다행히 걸을 정도는 됐다”며 “제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다음이 있더라도 이 시간 만큼은 다시 오지 않을거라 생각으로 꿋꿋하게 버텼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1점만 생각했다. 정신만 바짝 차리자는 생각만 했다”고 했다.
항저우에서 돌아온 안세영은 SNS를 통해 팬들에게 감사하면서 “또 다른 꿈을 이루고 빛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파리올림픽 금메달의 목표를 드러냈다. 어린 배드민턴 여왕의 ‘헝그리 정신’은 또 1년 뒤 파리로 향한다.
▼ 항저우 | 이정호 기자 alpha@khan.kr · 김은진 기자 mulderous@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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