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이 남극에서, 윤도현이 수조 속에서 노래한 까닭('지구 위 블랙박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빙하 앞에서 기타를 들고 있네?" 2023년 아카이브 영상을 찾아낸 윤(김신록)은 빙하 앞에 기타를 들고 서 있는 최정훈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묻는다. 그러자 AI 러스(고경표)의 목소리가 그 영상을 설명해준다. "2023년 뮤지션들이 만든 다큐멘터리야. 당시 지구가 변해가는 모습을 음악으로 기록한 영상이라고 되어 있어." 그러자 윤은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듯 기대에 찬 모습으로 되묻는다. "음악으로 감정에 호소한다? 통했어?"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다소 쓸쓸하다. "그 효과에 대한 기록은 없네. 윤이 보고 판단하는 건 어때?"
KBS 공사창립 50주년 대기획 <지구 위 블랙박스>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프로그램이 SF 방식의 드라마 같은 스토리텔링 위에 서 있다는 걸 보여준다. 2054년 7월 10일. 기후 위기로 인해 더 이상 인간은 지구에서 거주할 수 없게 됐고, 소수의 인간들만이 방공호에 탑승해 우주에서 지구의 회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일종의 데이터 센터인 지구 위 블랙박스에 홀로 남아 지구의 상황을 들여다보는 윤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지구의 상태 앞에서 절망감을 느끼며 2023년 아카이브 영상을 찾아보면서 그때 행동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후회를 전한다.
2054년 윤의 시선으로 되돌아보는 2023년 남극에서의 최정훈의 영상은 그래서 더더욱 절절한 안타까움을 담는다. 무려 190시간이 넘는 여정을 통해 겨우겨우 당도한 남극. 최정훈은 자신이 상상했던 남극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 앞에 놀란다. 눈으로 가득할 줄 알았지만 녹아 나지가 다 드러난 남극의 풍경. 특히 가수로서 최정훈은 그 남극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수시로 빙하가 무너져 바다로 떨어지는 굉음에 놀라고, 바다 위에서 녹아가며 수백 년 전의 공기를 밖으로 뿜어내며 나는 소리에 슬퍼진다. 얼음 위를 종종 걸음으로 걸어 다닐 걸로 알았던 펭귄들이 맨살을 드러낸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이나, 그들의 먹이가 점점 사라져 자신들도 모른 채 가족들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최정훈은 외투를 벗고 가벼운 스웨터 차림으로 기타 하나를 둘러맨 채 그곳에서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부른다. 그가 그 노래를 굳이 선택한 건 "그 노래의 화자가 자연을 의인화한 화자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애건 어떤 관계건 간에 자신의 모든 걸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가차 없이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서는 법도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자연 앞에 어떻게 보면 조금 무표정한 얼굴 앞에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일까. 그가 남극에서 부르는 이 노래의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라는 가사에 이 대자연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래도 추웠을 텐데, 굳이 최정훈이 외투를 벗고 노래를 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터다. 가수로서의 예의 같은 것이기도 하면서, 대자연 앞에 좀 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세워두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는 자연처럼 자신 또한 추위 앞에서도 노래 부르는 모습으로 남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남극의 기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외투를 벗고 노래를 해도 될 정도로 올라가버린 기후 변화가 그 짧은 영상에 담기지 않았던가.
두 번째 영상으로 윤도현 밴드가 동해에서 보여준 퍼포먼스 또한 이런 메시지가 담겼다. 윤도현은 동해안을 자전거로 달리며 그곳의 해안침식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전한 후, '흰수염고래'를 불렀는데 물이 차오르는 수조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담았다. 최정훈이 남극에서 보여준 기후 변화에 의해 빙하가 녹아내리는 상황들은, 윤도현이 동해에서 보여준 해안침식과 연결되면서 이것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절감하게 했다. 따뜻한 남극과 수위가 높아져 해안침식이 벌어지는 동해. 그 연결고리는 남극에서 외투를 벗고 노래하는 최정훈과 수위가 높아지는 수조 속에서 노래하는 윤도현의 모습으로 전해졌다.
SF 영화 같은 세계관 위에 남극과 동해를 오가는 환경 다큐멘터리가 더해지고 거기에 또한 최정훈과 윤도현 밴드의 음악 퍼포먼스까지 겹쳐졌다. 영화부터 다큐, 음악 예능 같은 이질적 장르들을 하나로 묶어낸 <지구 위 블랙박스>의 야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저 2054년 윤이 물어봤던 음악으로 감정에 호소한 이 프로그램은 과연 통했을까? 아쉽게도 시청률은 1.6%(닐슨 코리아)로 낮다. 하지만 그때는 무시했다며 회한에 젖은 윤의 이야기처럼 낮은 시청률에도 이 프로그램이 던지는 화두는 묵직하고 여운이 길다. 모쪼록 좀 더 많은 관심과 이를 통한 행동이 이어지길. 훗날 윤이 가진 뒤늦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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