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항저우 결산] 금빛보다 진했던 은, 동메달리스트의 희노애락-③
(MHN스포츠 권수연 기자) 흔히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만큼은 금빛보다 진하게 인상에 남은 은, 동빛의 순간들이 탄생했다. 아쉬움과 기쁨을 모두 아우르는 찰나의 2, 3위는 어떤 기록으로 한국 스포츠사에 한 획을 그었을까.
한국 육상이 낳은 최고 에이스이자 이제는 전세계급 선수로 발돋움한 우상혁(용인시청)은 이번 대회를 통해 자신의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도전장을 던졌다.
우상혁은 이번 항저우 대회가 본인의 세 번째 아시안게임 출전이었다. 지난 2014 인천 대회 당시에는 10위에 머무르며 입상하지 못했고, 2018 자카르타 팔렘방 대회때는 2m28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받았다.
이후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상혁은 더욱 눈부신 선수로 거듭났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2m35 기록으로 4위에 오르며 세계적인 점퍼로 도약한 뒤 2022 세계실내선수권 우승(2m34), 세계실외선수권 2위(2m35), 한국인 최초로 2023 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 우승(2m35) 등의 기록을 세우며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에 대한 기대를 크게 높였다.
그러나 이번 아시안게임에는 현역 선수 가운데 우상혁의 가장 큰 라이벌 중 하나로 꼽히는 무타즈 에사 바르심(카타르)이 출전했다. 지난 4일, 예선에서 2m19를 단번에 뛰어넘어 전체 1위로 결승에 도달한 바르심은 결승에서도 2m35를 1차 시기에 넘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m35를 1차 시기에 실패한 우상혁은 2개 대회 연속 2위에 머물렀다.
다시 한번 은메달이지만 우상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미소로 본인의 목에 걸린 은메달을 깨물며 유쾌한 장면을 선보였다. 우승자인 바르심과 함께 얼싸 안고 서로 기쁨을 나누고, 함께 메달을 깨무는 세리머니를 연출하며 성적에 관계없이 같은 고비를 함께 넘어온 스포츠인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은빛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미소와 함께 또 한번 눈부셨던 은메달 기록이 있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첫 선을 보인 브레이킹에서 한국은 초대 은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브레이킹계의 '리빙레전드'로 손꼽히는 김홍열(Hong10)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만 38세의 김홍열은 중학교때 친구의 춤동작을 따라하다 브레이킹에 입문, 그 뒤로 22년동안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며 종목 사상 최고 선수 중 하나로 꼽혀왔다.
17년 전인 2006년 한국 최초로 브레이킹 최고 권위 국제 대회인 레드불 피씨원 파이널에서 정상에 선 그는 7년 후 또 한번 우승을 차지하며 브레이킹의 새 역사를 썼다.
어느덧 30대 후반이지만 그의 열정과 체력은 오히려 더 팔팔하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내로라하는 신예, 강호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결승까지 올라가 은메달을 따냈다. 우승은 일본의 나카라이 시게유키가 차지했다.
"생각할수록 아쉽다"고 소감을 전한 그였지만, 그는 시상대 위에서 열정만큼이나 만개한 미소로 활짝 웃으며 자신의 목에 걸린 한국 최초 은메달을 환영했다. 김홍열은 이번 아시안게임 폐회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며 기수로 나서기도 했다.
'직장인 궁사'로 이번 대회에서 깜짝 스타가 된 컴파운드 대표팀 주재훈(한국수력원자력)의 은메달도 마찬가지다. 주재훈은 이번 대회 컴파운드 혼성 단체전에서 소채원(현대모비스)과 함께 생애 첫 아시안게임 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학교 시절 취미로 시작한 양궁은 그를 국가대표, 그리고 아시안게임 시상대까지 이끌었다. 동호인 출신으로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해 빈 축사에 과녁을 설치하고 홀로 훈련하던 에피소드부터,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대회를 나와야 했다는 직장인의 소소한 애로사항(?)은 그의 재능과 입상에 더욱 힘을 부여했다.
그 외에 이번 아시안게임에 첫 선을 보인 마라톤 수영(오픈워터스위밍, 10km)에서 터진 한국의 깜짝 첫 메달 소식도 희소식이다. 한국 마라톤 수영의 선구자로 불리는 박재훈(서귀포시청)은 5년 연속 대표팀에 발탁되어 국제대회에 나서왔다. 해당 이력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여자 해머던지기에서도 한국인 최초 입상 기록이 나오며 기쁨을 더했다. 김태희(이리공고)가 아시안게임 해머던지기에서 한국 육상 최초로 동메달(64m14)을 목에 걸며 영광을 한껏 누렸다.
김태희는 "지금 메달을 가지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다", "이게 정말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등의 소감으로 벅찬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다.
본래 포환던지기로 육상에 입문했던 김태희는 중학교때 원반던지기로 전향, 이후 고교 1학년때 다시 해머던지기로 전공을 바꾸며 한국 최초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에 올랐다.
행복하기만 한 은, 동메달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순간의 방심으로 금메달을 은메달로 바꾸며 눈물지은 선수들도 있었다.
지난 2일, 남자 롤러스케이트 스피드 3000m 계주에 나선 정철원(안동시청), 최인호(논산시청), 최광호는 굳은 얼굴로 은메달을 걸고 시상대에 섰다.
당시 경기 후반 선두를 달리던 정철원은 금메달을 확신하며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만세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러나 그의 롤러가 결승선을 넘지 못한 것을 본 대만 선수가 왼발을 먼저 뻗어 결승선에 닿았다. 직후 결과를 확인한 한국 선수단은 침통함에 빠졌고, 정철원의 실수로 동료 최인호도 함께 병역특례 혜택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여론의 비난도 봇물처럼 쏟아졌다.
이후 정철원은 본인의 SNS에 "선수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경솔한 행동을 했다,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게시했다. 시상대에 올랐으나 결코 웃을 수 없던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국내에서 46개월 연속 1위 신화를 쓰고있는 바둑계의 1인자 신진서 9단 역시 아시아무대에서는 단체전 금메달 직전까지 웃을 수 없었다. 이번 아시안게임 바둑에서 그의 개인전 금메달 여부에 큰 무게가 실렸으나, 4강에서 대만의 쉬하오훙 9단에 충격패하며 동메달 결정전으로 밀렸던 것이다.
신진서가 중국 국적이 아닌 연하의 해외 프로기사에게 패배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로, 문자 그대로 충격패였다.
결승에 오르지 못한 신진서는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의 이치리키 료 9단을 꺾은 뒤 동메달을 걸고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한편, 아시안게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한국 선수단은 오는 13일부터 19일까지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등으로 각자 일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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