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워커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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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 | 13년 차
신라호텔 라운지
신라호텔에 처음 간 건 대학교 1학년 때다.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경제 콘퍼런스에 참가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점심으로 나온 정식 세트의 전복만큼은 큰 인상을 남겼다. 신라호텔을 다시 찾은 건 2년이 지나서다. 시험 기간이 되면 여느 학생들처럼 학교 앞 프랜차이즈 24시간 카페에서 공부를 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시험보다 며칠씩 같은 풍경 같은 사람을 보는 게 신물이 났다. 결국 내가 경험해본 가장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장소인 신라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재즈 싱어와 피아노 연주자, 카페 직원들도 퇴근하는 시간까지 차를 몇 번이나 우려 마시며 라운지 구석 자리에서 밤샘 공부를 했고 해가 뜨면 학교로 돌아가 시험을 봤다. 졸업하기 전까지 매 학기 한 번씩은 이렇게 근사한 벼락치기를 했다. 누군가 시험 성적을 묻는다면, 애초에 결과가 중요했다면 그런 곳에서 시험 공부 따위 했을 리가 없을 거라고 대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시험 성적은커녕 과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최근 호텔의 유명한 망고 빙수를 먹으러 갔을 때 지금 나의 사치보다 일말의 허영이 깃든 내 20대의 사치가 더 멋있게 느껴져 왠지 모를 패배감을 맛봤다.
상경 | 2년 차
봉천동 기절초풍왕순대
의정부에서 왔다고 하면 열에 열은 부대찌개 이야기를 꺼낸다. 의정부 사람들 부대찌개 별로 안 좋아한다. 의정부에서 줄 서서 먹는 식당은 대개 곱창집이다. 부대찌개는 일 년에 한두 번 먹는 명절 음식 같은 개념으로 봐주시면 된다. 내게 중요한 건 국밥이다. 국밥은 단순히 음식이 아닌 삶을 나아가게 하는 연료다. 회사 점심시간에 파스타 먹고 ‘오늘 오후도 열심히 해보자’ 같은 말은 안 하지 않나. 국밥은 다 먹고 나서 ‘파이팅!’ 외칠 수 있는 음식이다. 의정부 집 근처에는 주유소처럼 찾던 국밥집이 있었다. 서울로 이사를 결정하고 방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은 것도 국밥집이다. 비 오는 날에도 부담 없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야 했다. 처음 이사 간 동네에는 이렇다 할 국밥집이 없었다. 옆 동네 국밥까지 전부 배달시켜 먹어봤지만 가짜 휘발유에 불과했다. 내가 원하는 건 고급 휘발유다. 지금 살고 있는 봉천동에서 임자를 찾았다. 이름부터 기절초풍이다. 나 같은 국밥 환자들에게는 병원 같은 가게다. 여기 주방장님은 나한테 이국종 교수님이나 다름없다. 보통 프랜차이즈 국밥은 머릿고기를 조금 넣고 마는데, 여기는 각종 돼지 내장을 때려 붓는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언젠가 이 동네를 떠날 때 망설여진다면, 그 이유의 절반 이상은 기절초풍왕순대 때문일 것 같다.
상경 | 12년 차
연희동 안산 자락길
서울에 가면 인디밴드를 볼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을 하며 서울에 올라왔다. 장기하, 눈뜨고 코베인,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그들을 보기 위해 20대 초반의 수많은 날들을 홍대와 연남동에서 보냈다. 낮에는 산책하는 걸 좋아했다. 안산 자락길은 연희동에 사는 친구를 따라 갔다 처음 알게 됐다. 그 후로는 혼자서도 곧잘 안산 자락길을 걷곤 했다. 밤 9시 넘어 자락길에 가면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책로를 걷고 있으면,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져 좋았다. 무섭기도 했다. 아무도 없을 때보다 반대편에서 손전등 불빛이 나타나면 더 그랬다. 한 번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 밤에 자락길에 데려갔다. 내가 앞장섰고 서울 남자가 뒤따라 걸었다. 수십 번도 더 걸은 길이었지만, 뒤를 돌아봤을 때 눈앞에 그 사람이 안 보이면 불안했다. 다시 눈에 보이면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을 끌어안고 밤 산책을 마쳤다. 사실 그때는 나도 서울 남자도 서로의 감정에 확신이 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함께 타면 사랑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하지 않나. 자락길에 다녀온 후로 우리는 진득하게 연애를 시작했다. 그때 그 서울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다.
상경 | 13년 차
흑석 한강센트레빌
회계사 공부를 4년 했다. 수입이 없으니 소비를 줄여야 했다. 그때는 학교 근처 옥탑방에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방에 어떻게 살았나 싶다. 성인 남자가 나란히 누우면 손등이 닿는 사이즈였으니까. 거기서 한 번씩 햄을 구워 먹었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스팸이었지만 런천미트를 샀다. ‘가격 차이 얼마 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것도 신경 쓰였다. 작은 옥탑방에서 햄을 구우면 실내 전체가 화생방 훈련소가 된다. 방에 창문이라고는 A4 두 장 사이즈의 창문 딱 하나뿐이었다. 런천미트가 뿜어내는 연기를 다 내보낼 리 없었다. 그래도 열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창문을 열면 다른 옥탑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로 보이던 유일한 아파트가 흑석 한강센트레빌이다. 저기는 창문이 크겠지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지금도 아파트에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가끔씩 센트레빌을 지나갈 때마다 그 옥탑방을 생각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 먹지도 못할 스팸을 한 봉지 가득 산다.
상경 | 13년 차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남들보다 1년 늦어진 대학 생활은 나를 서울로 이끌었다. 막연하게 꿈꿨던 서울 생활은 기대감 100%. 하지만 시끌벅적하던 경산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한 단칸방은 기대감을 걱정으로 바꿔버렸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자취방, 스마트폰도 완벽히 보급되지 않던 시절. 홀로 있는 단칸방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고향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쯤, 무작정 지하철역으로 갔다. 혜화역 4번 출구 안으로 들어가 지하철 노선도를 봤다. 그때 눈에 띈 곳이 ‘명동’이었다. 명동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렴풋이 봤던 뉴스에서는 명동의 한 화장품 가게의 땅값이 서울에서 제일 비싸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핫플’로 향했다. 명동의 첫 모습은 충격 그 자체.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골목을 꽉 채운 모습은 별천지였다. 서울 사람들이 다 명동에 모여 있는 줄 알았다. 물론 골목을 채운 사람들 대다수가 외국인 관광객임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명동은 나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두 동생과 함께했던 고향 집과 달리 서울의 자취방은 차갑고 적적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명동까지 뛰었다. 혜화에서 동대문, 을지로를 지나 명동으로 가는 길. 커다란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새벽의 적막감이 적당한 안도감을 선사했다. 마치 고향의 길거리와 같은. 새벽의 명동은 고요했고, 텅 빈 명동 골목 한가운데 명동예술극장이 있었다. 내 달리기의 목적지였던 문 닫힌 극장. 새벽의 달리기에서도, 인생의 마라톤에서도 숨 고르기가 필요한 순간. 내게는 큰 위로를 준 곳이다.
상경 | 9년 차
세종이야기 전시관
대학교에 입학하고 서울에 자취방을 구하러 온 날. 엄마와 팔짱을 끼고 ‘제일 서울다운 곳’으로 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제일 서울다운 곳’은 광화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대구에 사는 동안 TV를 통해 가장 많이 본 서울이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가운데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을 보며 “여기 진짜 서울 같다” 했던 게 생각난다. 기분 좋은 첫 만남 때문이었을까?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직장인이 된 후로도 광화문을 자주 찾는다. 그중에서 내게 특별한 곳은 세종이야기 전시관이다. 세종이야기 전시관은 세종대왕 동상 아래 지하에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세종의 업적을 망라한 자료와 작품들이 있는 곳이다.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되고 국어 교사가 된 후로는 매년 한글날에 찾는다. ‘내가 이분이 만든 문자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네’ 생각하고 있자면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이제는 내게 동경의 장소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중요해지는 곳이다.
상경 | 8년 차
삼청동수제비
첫 서울살이는 군복무로 시작했다. 원래는 JSA 경비병을 지원했지만 떨어져 수도방위사령부로 배치받았다. 부대는 삼청동에 있었다. 휴가를 나오면 늘 선임들과 아침을 먹고 각자 갈 길로 흩어졌다. 그때 가던 곳이 삼청동수제비다. 종종 혼자 외출을 나갔지만 아는 곳이 없어 부대 주변 동네를 돌아다녔다. 삼청동수제비에서 혼자 밥 먹는 날도 있었다. 아는 곳이 많지도 않았지만, 이 집 수제비가 정말 기가 막힌다. 올해도 작년에 이어 미쉐린 가이드 맛집으로 선정됐다. 서울에 대한 동경은 대부분 군 생활 때 생겼다. 삼청동에서 봤던 서울의 민간인은 늘 어딘가 들떠 보였다.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들여다보면 갈 곳도 놀 곳도 많았다. 그렇게 군복무를 마치고 광주로 돌아갔다. 취업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을 땐 선유도에 방을 얻었다. 그때도 주말이 되면 북악산 등반을 하고 삼청동수제비를 들렀다. 직장인이 되면서 서울에 대한 낭만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삼청동수제비 맛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아내, 아이와 함께 삼청동수제비에 간다.
상경 | 9년 차
가로수길 일모 아울렛
한때는 ‘지하철 타고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곳’까지를 서울로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나도 서울에 사는 셈이긴 했다.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온양온천역이 있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끝자락에 있는 역이다. 문제는 온양온천역에서 서울역까지 2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점이다. 온양에서 서울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아산온양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쯤에는 <힙합퍼>의 스트리트 스냅이 주목을 끌었다. 나도 거기에 나오고 싶었다. 어떻게든 카메라에 찍혀보려고 당시 서울에서만 살 수 있던 스투시 티셔츠와 나이키 덩크 로우를 신고 가로수길과 압구정 로데오를 어슬렁거렸다. 성인이 된 후로 가장 중요한 곳은 가로수길의 일모 아울렛이었다. 거길 가면 내가 동경하는 패션 에디터, 모델, 디자이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잡지로만 보던 라프 시몬스, 톰 브라운 옷을 70%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일모 아울렛을 오가며 에디터의 꿈을 키웠다. 지금은 마가찌니로 이름이 바뀌었고 장소도 옮겼다. 일모 아울렛이 있던 곳에는 현재 메종키츠네 가로수길점이 들어섰다. 갈 때마다 일모 아울렛을 생각한다.
“서울 시내를 쏘다니며 대학 입시 논술을 보러 다녔다. 한남대교 위에서 마이 앤트 메리의 ‘S.E.O.U.L’을 들으며 ‘서울다운 건 뭘까?’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상상하던 서울의 모습은 시트콤 <논스톱>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매일 신나는 일이 기다리는 곳.”
상경 | 8년 차
북악팔각정
지방 사람이 처음 서울에 올라오면 먼저 서울에 올라온 누군가가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 내게로 그런 사람이 있었고, 나도 그렇게 한 사람이 있다. 나의 서울 지인은 북악팔각정으로 나를 데려갔다.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거기서 한쪽 다리를 팔각정에 올리고 엄지를 든 채 사진을 찍었다. 그후로 8년 동안 매년 9월 북악팔각정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남들이 새해 전야에 하는 일을 나는 세 달 앞당겨 하는 셈이다. ‘올해는 어떻게 보냈네’ ‘내년에는 무얼 하겠다’ 곱씹고 다짐하는 시간이다. 북악팔각정에서 떠올렸던 첫 매장을 오픈하고 싶다던 계획도, 라무라 이름으로 제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계획도 운 좋게 이룰 수 있었다. 사실 매년 계획하고 북악팔각정에 가는 건 아니다. 평소에는 잘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러다 문득 한 번쯤 가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게 늘 9월이었다. 고향 제천에도 북악팔각정 같은 곳이 있다. 용두산 정상이다. 고향에 살 때는 그곳에 자주 갔다. 기회가 된다면 나를 북악산에 데려다준 지인에게 용두산을 소개해주고 싶다.
상경 | 7년 차
한남대교
한남대교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고속도로 끝에 있다. 한남대교 위에서 처음 바라본 한강은 서울 그 자체였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서울 시내를 쏘다니며 대학 입시 논술을 보러 다녔다. 한남대교 위에서 마이 앤트 메리의 ‘S.E.O.U.L’을 들으며 ‘서울다운 건 뭘까?’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상상하던 서울의 모습은 시트콤 <논스톱>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매일 신나는 일이 기다리는 곳. 그렇게 상경 생활을 상상하며 서울의 캠퍼스들을 누볐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논술 시험은 다 떨어졌다. 나는 지방 대학에 입학했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8년이 걸렸다. 지금은 매일 출근길에 동호대교를 건넌다. 퇴근길 지하철 3호선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노을에 물든 한남대교와 고급 빌라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은 열아홉 살 내가 상상했던 서울과 서른세 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사투리는 아직 고치지 못했다.
상경 | 5년 차
시그니엘 서울
남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소풍이라는 소풍은 전부 잠실로 갔다. 가끔 ‘남양주도 서울 아니냐’ 하는 분들이 계신데, 서울 사람들은 ‘나 서울 놀러 간다’는 말 안 한다. 중학생이 되자 잠실에, 그것도 잠실 한복판에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어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롯데월드타워였다. 이따금 서울에 갈 때마다 유선형의 은빛 건물은 점점 하늘에 가까워졌다. 서울 동쪽 경계선 너머 화도읍. 그곳에서 어린 시절 내내 롯데월드타워가 지어지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성인이 된 내게 여전히 롯데월드타워가 서울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창모에게 워커힐 호텔이 있다면 내게는 시그니엘 서울이 있다. 언제든지 내킬 때마다 시그니엘 서울에서 일주일 정도씩 묶을 수 있다면 ‘나 좀 성공했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술자리에서 정신 승리차 하는 농담이 있다. “난 시그니엘 레지던스 사면 거기 안 살고 우리 고양이 캣타워로 쓸 거다.” 사실 우리 집 고양이는 창밖 사람들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시그니엘은 너무 높아서 사람들이 안 보일 거다. 그래도 살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고 싶다. 고양이도 좋아할 거다.
상경 | 18년 차
홍대 마스터 플랜
지난 10여 년 사이 힙합은 한국 대중음악계 주류로 자리 잡았고, 이제 중고등학생 사이에서 힙합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 혹은 유명한 래퍼 이름 정도 아는 친구들은 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창 힙합에 빠져들던 2000년 전후엔 사정이 많이 달랐다. 특히 내가 살던 강릉에서 힙합을 좋아하는 중학생은 전교를 뒤져도 찾기 힘들었고, 그래서 내가 힙합을 접하는 창구는 자연스레 인터넷이 됐다. 다음 카페와 소리바다, 소울시크를 오가며 모은 MP3를 소중히 분류하고, 큰맘 먹고 상아레코드에서 주문한 CD들을 닳도록 듣던 시기. 힙합 리듬을 깔아놨다는 홍대에서 신촌은 막연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성지라 불리던 클럽 마스터플랜(이하 MP)에 가는 것은 한국 힙합 팬으로서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클럽 MP는 문을 닫았고, 나는 <MP Still-A-Live>에 담긴 비디오로 가본 적도 없는 MP의 마지막 추억을 새겼다. 스무 살이 되어 찾아간 그곳은 클럽 정글을 거쳐 긱 라이브하우스가 되어 있었고, 여전히 체스판 바닥이었지만 중학생 시절의 나도, 꿈속의 클럽 MP도 이제 거기에 없었다.
“서울 사람들은 ‘나 서울 놀러 간다’는 말 안 한다. 중학생이 되자 잠실에, 그것도 잠실 한복판에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어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롯데월드타워였다. 이따금 서울에 갈 때마다 유선형의 은빛 건물은 하늘에 가까워졌다. 어린 시절 내내 롯데월드타워가 지어지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상경 | 8년 차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
나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서울, 중학교는 시카고, 고등학교는 다시 서울, 대학교는 버지니아에서 다녔고 8년 전 서울에 자리 잡았다. 서울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이태원의 한 식당이다. 지금은 이태원에서 버거집 롸카두들을 운영 중이다. 서울에서의 추억은 이태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가게를 차리고 이태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공원을 하나 발견했다. 계단을 올라가야만 보이는 곳이라 꽤 오랜 시간 그냥 지나치며 보냈다. 이름은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있어 나는 ‘유관순 공원’이라고 부른다. 요즘처럼 날씨가 서늘해지면 점심시간에 나가 거기서 밥도 먹고 낮잠도 자고 온다. 생각해보면 내가 살던 곳에는 늘 유관순 공원 같은 곳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 D.C.에는 듀폰 서클이라는 공원이 있다. 대학교에서 인턴을 하던 시절, 나의 생활 반경은 듀폰 서클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어딜 가더라도 그곳을 지나야 했다. 매일 잠깐이라도 공원 벤치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내게 공원은 그 도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다.
상경 | 6년 차
PH129
내가 살던 제주도 집은 바다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공항 근처라 집 주변의 모든 건물은 낮았다. 그렇게 어딜 가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17년을 살았다. 서울 사람에게 제주도가 어떤 곳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내게 서울은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다. 처음 마주한 서울은 도시 전체가 빌딩숲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못 느꼈던 그 빽빽한 도심 풍경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꽉 막힌 빌딩숲과 한강 야경을 볼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방은 강남에 얻었다. 강북에서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늘 영동대교를 건넜다. 해 질 무렵 저 멀리 영동대교 끝에서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PH129. 이름부터 서울다웠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였다. PH129를 볼 때마다 저 집에 살면 얼마나 뿌듯할까 상상한다. 사실 한강에 비친 PH129를 보는 것만으로 감상에 젖을 때가 있다. 제주도 촌놈이 멀리도 왔구나. 그토록 동경하던 서울에서 돈 벌며 살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서울을 좋아한다.
상경 | 14년 차
신사동 엘쁠라또
2009년. 서울에서 보낸 첫해의 추억은 472번 버스를 타고 피어났다. 신촌에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472번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 가로수길로 향했다. 신촌에도 카페는 많았지만 가로수길 카페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조금 더 여유롭고 차분한 느낌이랄까. 매일 새로운 카페를 돌아다니며 과제를 하고 있으면 정말 서울 대학생이 된 기분이 들어 좋았다. 가로수길에는 낯설고 신기한 식당도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순천의 유명 식당은 전부 한식당이었다. 그런 내게 가로수길의 동남아 및 유럽 음식점들은 신세계였다. 그중 내게 특별한 곳은 엘쁠라또다. 학교 동아리 선배가 운영하던 스페인 식당이다. 메뉴판에는 낯선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다. 선배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자면 어른의 세계인 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쁠라또는 도곡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따금 도곡동 엘쁠라또를 찾으면, 472번 버스에서 보던 서울 풍경과 가로수길의 외국어 이름 식당들이 생각난다.
상경 | 18년 차
밤섬
대구에서 살던 집은 낙동강 바로 옆에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폭우가 내리면 집에 강물이 들어올 정도였다. 개구리가 들어온 적도 있다. 늘 강을 가까이 두고 살아서 강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서울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강에 자주 간 건 자전거 타기 좋았기 때문이다. 한강에 자주 가니 가장 많이 사진을 찍은 것도 한강이다. 내가 느낀 ‘서울다움’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변화무쌍이다. 서울에서는 유지되는 것은 거의 없다. 하루가 다르게 골목이 사라지고 건물이 올라간다. 반면 한강은 그 모습을 잘 유지한다. 가장 서울을 대표하는 공간이 ‘서울다움’과 가장 먼 곳이라는 점이 지금도 아이러니다. 그런 한강에서도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는 곳이 있다. 밤섬이다. 밤섬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곳이다. 지금도 조용히 퇴적물을 받아들이며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다. 밤섬을 좋아하는 건 사람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멀리서 지켜볼 수는 있지만 만날 수가 없다. 밤섬에서 꼭 찍고 싶은 사진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한 번쯤은 금지된 섬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상경 | 3년 차
약수동 다산 성곽길
서울에 올라온 뒤로 찾았던 건 물이다. 내가 살았던 곳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스무 살까지 살았던 포항도, 재수를 했던 인천도, 대학 생활을 했던 부산에도 바다가 있다. 서울에서는 청계천과 한강을 찾았다. 하지만 강은 바다와 달리 반대편이 막혀 있었고 내가 찾던 해방감을 주지는 못했다. 물을 찾는 습관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우연히 약수동 다산 성곽길을 걷게 됐다. 저 멀리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성곽길에선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 고요함 속에서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일이 안 풀리거나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면 성곽길을 찾는다. 성곽길에서 보았던 한 커플도 내 기억 속에 깊게 자리 잡았다. 커플은 2층 테라스에 나와 모닥불을 피운 채로 각자 책과 영화를 보았다. 나도 누군가와 저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다산 성곽길에서 나만 그 생각을 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근처 부동산에 방을 알아보러 가니 ‘이효리 이상순 커플도 미리 산 곳’이라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실제로 다산 성곽길 근처의 부동산은 지난 몇 년 사이 가격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성곽을 보면서 모닥불을 피우는 날이 오겠지.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산책한다.
“서울은 도시 전체가 빌딩숲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못 느꼈던 그 빽빽한 도심 풍경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꽉 막힌 빌딩숲과 한강 야경을 볼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Editor : 주현욱 | Photography : 표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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