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맨’들은 왜 한화로 향하나
[비즈니스 포커스]
‘한국의 우주 개발 1세대’로 꼽히는 조광래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원장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자리를 옮긴다. 한화 우주 사업의 기초 연구를 담당하는 ‘미래우주기초기술연구원(가칭)’의 최고기술경영자(CTO·원장)로 합류한다.
조 전 원장은 항우연 창립 멤버다. 1988년 항우연 전신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 입사해 항우연 중형로켓개발 그룹장, 액체로켓(KSR-Ⅲ) 사업단장, 우주발사체 사업단장, 발사체 연구본부장, 나로호발사추진단장 등을 맡으며 ‘로켓 외길’을 걸어왔다.
항우연의 다른 연구진 10여 명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이직했거나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산업계에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축적한 기술력을 민간 기업이 독식한다는 비판과 기술 유출 문제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2032년까지 총 2조132억원이 투입될 차세대 발사체 개발을 주관할 체계 종합 기업 선정을 앞둔 시점에서 핵심 연구진이 한화로 대거 이직하면서 이해 충돌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부정적인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간 기업 주도의 우주 개발 시대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란 분석도 있다. 정부 기관과 민간 기업 간 인력 이동은 미국 등 우주 산업 강국에선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스페이스X는 지난 5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유인 우주 비행 프로그램 최고책임자였던 캐시 루더스를 영입해 인류를 달과 화성을 비롯해 심우주에 보내겠다는 스타십 프로젝트의 총괄 관리를 맡겼다. 2020년에는 NASA에서 유인 탐사 부문 고위직으로 10년 이상 일한 윌리엄 거스텐마이어를 스페이스X의 제작·비행안전성 부문 부사장에 영입하기도 했다.
1500조원 시장 열리는데…예산도 인재도 부족
한국의 우주 예산과 연구 인력은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놓은 ‘2022 우주 산업 실태 조사’를 보면 미국은 우주 산업 종사자가 17만 명인데 비해 한국은 1만 명 수준에 그친다.
우주 산업은 국가 주도의 올드스페이스(old space)에서 민간 주도의 뉴 스페이스(new space)로 빠르게 진전되면서 민간 기업의 기여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자본력을 갖춘 민간 기업의 참여가 늘어나며 우주 산업은 고속 성장하고 있다.
투자은행 모간스탠리는 세계 우주 산업이 2020년 3850억 달러(약 520조원)에서 2040년 1조1000억 달러(약 1486조원)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세계 우주 산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 안팎에 불과하다. 우주 개발 예산과 규모를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우주 분야 시장 조사·컨설팅 업체인 유로컨설트에 따르면 2022년 국가별 우주 사업 투자액에서 한국 정부는 7억2400만 달러로 10위에 그쳤다. 1위인 미국(620억 달러)과 2위 중국(120억 달러), 3위 일본(48억9800만 달러)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이다. 올해 한국의 우주 개발 예산은 8742억원으로 전년(7340억원) 대비 19.1% 늘었지만 여전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0.04%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11월 ‘우주항공청’ 신설을 주요 골자로 하는 미래 우주 경제 로드맵을 선포하면서 “2032년 달에 착륙해 자원 채굴을 시작하고 2045년에는 화성에 태극기를 꽂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정작 이 계획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우주 개발 연구·개발(R&D) 예산은 대폭 삭감했다. 우주 산업이 정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우주 개발 연구를 담당하는 핵심 연구 기관인 항우연의 2024년 연구 운영비도 올해보다 16% 축소된 1001억원으로 편성했다. 정부의 R&D 예산 삭감과 맞물려 우주항공청 설립 논의도 표류하고 있어 연내 설립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기업 이직 이면엔 열악한 처우 문제
최근 국가 주요 R&D 예산 삭감 이슈와 맞물려 우주 연구 권위자들의 한화행을 둘러싸고 연구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는 최근 2024년 예산안에서 R&D 예산을 올해(24조9500억원)보다 3조4000억원(13.9%) 삭감한 21조5000억원으로 배정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국가 재정 전략 회의에서 직접 “나눠 먹기식, 갈라 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사상 초유의 R&D 예산 삭감에 반발해 학계에선 이례적으로 집단 행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학계는 R&D 예산 삭감이 연구 생태계 파괴와 과학기술 인재의 이탈 가속화로 이어져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기술 패권 전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학·물리·화학·생명과학 등 기초 과학을 연구하는 학회의 모임인 ‘기초과학 학회협의체(기과협)’는 9월 25일 성명을 통해 예산 삭감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기과협은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R&D 투자를 계속 늘려 온 것은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고 미래라는 굳건한 믿음에 기반한 것”이라며 “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이 향후 회복하지 못할 상황으로 이어진다면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서 인재 양성만이 유일한 희망인 우리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R&D 예산 삭감에 반발해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과 노조·정부 부처 노조 등이 참여하는 첫 연대 회의인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도 출범했다. 카이스트,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포스텍 학부 총학생회, 서울대 자연대·공과대 학생회, 고려대 총학생회 등도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정부 출연 연구 기관과 이공계 연구 중심 대학에 대한 R&D 예산 삭감 시 연구 내용이 달라지고 질적으로 하락할 것”이라며 “전 세계가 R&D 주도권 확보를 위해 치열히 경쟁하고 있다. 안정적 연구 환경 속에서 창의적 연구 성과가 꽃피워질 수 있는 만큼 예산 전면 삭감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등 떠밀려 민간·해외로…짐 싸는 우주 핵심 인재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구자 커뮤니티에선 정부 출연연에서 민간 기업 연구소로 이직하거나 해외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시글도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한화로의 대거 이직이 이슈가 된 항우연은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리고도 초임 연봉으로는 25개 정부 출연연 중 꼴찌 수준이다.
항우연의 2022년 정규직 평균 보수액은 9500만원으로 출연연 중 하위권이지만 대졸 신입 사원 초임으로 보면 3800만원 수준으로 떨어진다. 석사 출신 초봉이 40만 달러(약 5억원) 수준으로 알려진 미국의 민간 우주 기업 스페이스X와 대조적이다.
정부 기관 소속 직원들의 임금·수당·성과급 등을 합친 총액을 제한하는 총액 인건비 제도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총액 인건비 제도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낮은 연봉에 3교대와 휴일 근무를 해도 근로 수당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우연의 위성연구소 직원 8명은 지난 4월 항우연을 상대로 밀린 야간·휴일근로수당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열악한 처우 때문에 젊은 이공계 연구자들은 항우연보다 연봉을 2배 이상 주는 한국의 대기업 연구 기관을 선택하거나 해외로 나가고 있다”며 “젊은 연구자들이 유입되지 않으면서 항우연의 고령화가 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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