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야영] 산 친구의 우정은 전우만큼 진하다

민미정 2023. 10. 10.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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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도락산
충주호 캠핑월드 야영장은 월악산 국립공원과 인접해 있어, 산행을 마치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17년 동안 한 달에 3~4주간 쉼 없이 산에 올랐다. 그저 산이 좋아서 주말마다 혹은 휴일마다 산에 가다 보니, 스치는 인연이 많다. 그중 기억 속에 남은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어쩌다가 그들 중 누군가를 우연히 산에서 만났는데,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에게 먼저 인사하는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재빠르게 머릿속 기억창고를 뒤진다.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나면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손을 내밀거나 포옹을 하면서 반갑게 인사한다. 하지만 도무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을 땐 어쩔 도리가 없다.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그럼에도 어떤 상대는 이해한다는 듯 선뜻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올랐던 산 이름을 알려준다. 기억 속에서 빛을 잃었던 추억 하나가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내가 누리는 작은 기쁨 중 하나다.

월악산 영봉을 오르고 있다. 영봉에서는 멀리 충주호와 함께 금수산, 계명산 등 충주와 제천의 여러 산을 조망할 수 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문영화 언니' 라고 저장된 번호가 화면에 떴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문영화는 굴지의 여의도 IT기업에서 승승장구 하며 바쁘게 산다. 그런 그녀와 몇 년 만의 통화였다. 그녀는 잠시 몸담았던 동호회에서 백두대간 종주와 100대명산 인증을 하면서 만났다. 그때 인연으로 2011년 처음 내가 북알프스를 리딩할 때 함께했다. 이후 나는 의무적으로 산에 오르는 것이 버거워 동호회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백패킹을 시작했다. 언니와의 연락은 자연스레 뜸해졌다. 그녀가 응답했다.

"응! 잘 지내지. 여전히 산은 열심히 다니고 있지?"

월악산 영봉을 오르고 있는 문영화씨.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단풍나무를 감상하고 있다.

산에 진심인 언니는 사내 산악회에서도 산행대장을 맡고 있다. 블랙야크 100대명산 인증에 다시 도전, 곧 100개를 완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휴일을 반납하면서 일할 정도로 바빴다가 이제 좀 짬이 났다고 했다.

"미정아, 다음주에 월악산이랑 도락산을 연계해서 갈까 하는데 같이 갈래?"

그녀는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진행하는 산행마다 함께해 주었던 언니의 부탁이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응했다.

"좋아요! 오랜만에 언니랑 달려보겠네요!"

블랙야크 100대 명산 중 하나인 도락산. 문영화씨가 산행 도중 암릉에 올라 포즈를 취했다.

언니와 산행하는 것도 좋지만 옛추억을 곱씹으며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게 더욱 신났다. 산행 당일 아침, 언니는 내가 사는 집 앞까지 왔다.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부터 수다가 시작됐다. 수도 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콸콸, 우리는 시끄럽게 떠들었다. 몇 년 연락이 뜸하다고 해서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힘든 산행을 함께했던 사이인 만큼 그 끈은 여전히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살짝 무디어진 산에서 느끼는 감동이 언니와 대화할수록 되살아났다.

지루할 틈 없이 순식간에 월악산 신륵사주차장에 도착했다. 하루 두 개의 산을 오를 예정이라 가장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언니는 배낭을 챙기고 스틱을 꺼내면서 말했다.

"요즘 야근하느라 체력이 떨어져서 속도가 느릴지 몰라. 어쩌면 도락산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고."

도락산 내궁기 코스는 거리가 짧은 만큼 산세가 가파르기 때문에 여기를 오르려면 적절한 체력안배가 필요하다.

"언니, 나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타이틀이나 기록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언니랑 보조 맞추며 얘기하면서 걷고 싶어서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언니가 부담을 가질까봐 예전의 나를 상기시켰다. 주차장을 떠나 너덜길이 시작됐다. 길을 고르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날씨는 가을이 오는가 싶을 정도로 선선했는데, 낮에는 다시 여름으로 돌아갔다. 해를 거듭할수록 9월 평균기온은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떠들던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바람 한 줄기 새들어 올 틈조차 없이 등산로는 나무들로 빽빽했다. 덕분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감상할 거리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가을 단풍을 기대하기엔 시기가 너무 일렀다.

도락산 암릉 틈새 곳곳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등산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근사한 장식품이다.

기나긴 계단 끝에 올라설 때까지 우리는 아주 간단한 말만 주고 받았다. 쉼터에서 신륵사 삼거리까지 된비알이 이어졌다. 언니는 이때쯤 호흡을 찾은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예전에…"로 물꼬를 튼 언니는 걷는 속도를 올렸다. 덩달아 말 소리 템포도 빨라졌다. 언니의 속도에 맞추느라 나의 모든 신체기관들이 풀가동되어 작동했다. 그 와중에 언니가 쏟아내는 추억들은 시골집에서 발견한 낡은 앨범 속 사진들처럼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래 그때 그랬었지.'

또다시 기억의 조각들이 되살아 났다.

사실 나는 꼭 월악산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집 앞 단골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여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쫓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약한 생각은 신륵사 삼거리에서 영봉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지옥을 통과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잠시 후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청량감이 온몸에 퍼졌다. 그제야 멋진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절벽과 그것을 둘러싸며 영봉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갈 땐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발끝에 힘을 주고 단숨에 계단을 통과했다. 정상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언니가 정상 인증을 하는 동안 파노라마 뷰를 감상했다. 저 멀리 충주호와 함께 매봉산과 금수산이 보였다. 설악산, 치악산과 더불어 한국의 3대 악산으로 불리는 월악산은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이런 멋진 곳에서 야영하고 싶다는 미련만 남기고 재빨리 하산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도락산도 올라야 했다. 이런 발도장 찍기 식의 산행은 지양하는 편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언니를 위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산행 중 전망 좋은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문영화씨. 곧 완주하는 100대 명산 이후에는 백두대간 종주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월악산에서 내려와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도락산 들머리에 도착했다. 언니가 준비해 온 김밥과 과일로 배를 채웠다. 줄곧 여유로운 백패킹만 다니다가 오랜만에 공격형 산행을 하니, 산행 시간을 단축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월악산에서 웜업도 했겠다 도락산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갔다 오자!'

빼곡한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코스가 짧은 덕분에 금세 시원한 경치와 만났다. 암릉 곳곳에 자리한 소나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음이 급한 언니를 불러 세워 사진을 찍었다. 아무리 인증이 중요하지만, 대놓고 유혹하는 멋진 나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셔터 누르기를 멈추자마자 언니는 또 바쁘게 걸었다.

"언니 혹시 내가 안 보이면 그냥 정상 찍고 내려와요~!"

역시 나는 걷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오를수록 경사가 심해졌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눈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감상했다. 그냥 내달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조금 여유를 부려도 정상을 밟고 내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한 언니를 위해 일단 카메라를 집어넣고 빠른 걸음으로 언니 뒤에 따라 붙었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 숨이 헐떡거렸다. 가파른 돌계단을 쉬지 않고 올랐다. 정상 풍경은 볼 게 없었다. 지나온 암릉 구간이 하이라이트였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다시 하산하기 시작했다. 인증하느라 잠시 정상에 머물 언니를 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올라오면서 봐둔 명당자리에 앉아 등산화를 벗었다. 가방에서 언니가 준 사과 하나를 꺼내 한 입 물었다.

'그래. 산은 이런 맛이지.'

뜨거워진 발을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과 입안을 달콤함으로 가득 채우는 사과 한 조각,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광. 밝은 달까지 함께였다면 완벽한 청풍명월이었겠지만, 이 순간만큼으로도 충분했다. 잠시 후 언니가 도착했다.

"언니, 하산은 얼마 안 걸릴 것 같으니까 등산화 벗고 앉아봐요."

목표를 달성해서 그런지 언니는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였다. 그녀는 등산화를 벗고 내 옆에 앉았다.

"좋다. 기분도 좋고, 풍경도 좋고, 이 순간도 좋고."

사과를 먹고 있는 언니를 카메라에 담았다. 강렬한 햇빛을 가리겠다고 꺼내 쓴 창 넓은 '샬랄라' 모자가 살짝 어색했다. 하지만 뭣이 중요하랴. 각자 산에 오르는 목적은 다르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필요가 없다. 내가 거리낌 없이 편하고 좋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1일 2산' 인증을 무사히 끝내고 충주호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이제부터 내가 바라던 시간이 돌아왔다. 언니는 단숨에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렸다. 우리는 서서히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랜턴을 밝히고 술잔을 기울였다. 바쁘게 움직였던 하루를 곱씹었다. 그리고 다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언니의 기억은 보물창고였다. 내가 잊고 있었던 소중한 추억들이 거기서 하나씩 나왔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함께했던 얼굴과 이름들을 떠올렸다.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스쳐 여기까지 왔구나.'

기회가 된다면, 아니 우연이라도 한 번쯤 더 그들과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타임이 시작될 때까지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월악산(1,097m)

신륵사주차장∼신륵사 삼거리∼영봉(정상)∼원점회귀(산행거리 7.3km/산행시간 3시간)

도락산(964m)

내궁기 하룻밤궁궐 터∼도락산 정상∼원점회귀(산행거리 약 3.4km/산행시간 약 2시간)

충주호 캠핑월드

글램핑, 오토캠핑, 파쇄석, 수영장, 잔디 등이 준비되어 있어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충주호와 맞닿아 있어 레이크 뷰가 일품이다. 예약은 매월 1일 오후 9시에 가능하다. 단독 '오토존'은 호수와 인접해 있어 경치가 좋다. 개별 화장실과 개수대도 이용할 수 있다. 파쇄석 오토 캠핑장도 괜찮다. 경치가 살짝 가려진 곳이 있지만 그럭저럭 충주호가 잘 내다 보인다. 선착순이라 좋은 자리를 맡으려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개수대나 화장실은 공용이다.

활옥동굴

투명카약을 탈 수 있는 곳이다. 충주호 캠핑월드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다. 동굴 내부 온도는 11~15℃를 유지하고 있어, 경량 방한복을 챙겨가는 것이 좋다. 동굴 안에 카페가 있다. 여기서 와인도 즐길 수 있다.

입장료

_ 1만5,000원(보트 대여료 포함).

이용시간

_ 9:00~16:00.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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