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이 그냥 작곡가? 6·25 침략군 장교였다 [기자의 시각]
북·중공 군가 작곡가 정율성 논란의 핵심은 그가 대한민국 영토에 혈세로 기념 공원까지 지으면서 기려야 할 대상이 맞느냐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중국 관광객 유치에 필요” “과거 정부도 인정” “한중 우호의 상징” “분단의 산물” 등 말이 많지만 다 곁가지다. 정율성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될 일이다.
사실관계는 간단하다. 그는 1914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중국에 넘어가 193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해 ‘팔로군 행진곡(중국공산당 군가)’을 작곡했다. 북한에는 1945년 12월 넘어갔다. 인민위원회 간부가 됐고, 노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도 됐다. 이듬해 김일성을 대면했다. 그냥 작곡가가 아니라 당 간부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잘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는 한국군으로 치면 북한의 영관급 장교였다. 정율성은 1947년 북한 인민군 소좌(한국의 소령)로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부장이었다. 인민군 정복을 입고 아내와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협주단 단장도 겸하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김일성 정권·북한군 찬양가 30여 곡을 작곡하고 전국을 돌며 200여 차례 공연했다. 그 공로로 1948년 11월 김일성 포상장을 받았다.
정율성은 6·25 대남 침략 전쟁에 참전했다. 전범 인사다. 인공기가 휘날리는 ‘점령 서울’에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후까지 머물다 중국으로 피신하고 중국으로 귀화했다. 이듬해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1·4후퇴로 밀리자 정율성은 중공군 장교로 중공군과 함께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시내를 돌며 조선궁정악보 등 유물을 약탈해갔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과 중공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다 중국에서 1976년 생을 마쳤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12월 당시 보훈처(현 보훈부)는 정율성 서훈 신청을 받아 심사했으나 부결 처분했다. 정율성이 일제 시기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다는 설이 있어서 조사해봤는데 실제는 달랐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항일 이력은 없고 왕성한 6·25 침략군 활동만 쏟아져나왔다. 문 전 대통령이 베이징대 연설에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서 한껏 띄워놓은터라 친문 일색의 보훈처는 어떻게든 정율성을 추서하려 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 등 과거 정부에선 별 문제가 되지 않다 정율성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반(反)대한민국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광주시도 정율성이 ‘침략군 장교’였다는 무서운 실체를 미처 몰랐기 때문에 그간 기념 사업을 추진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를 알고도 ‘정율성 기념 사업’을 강행하는 건 침략 전범을 인정하는 것으로 읽히는 등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우려가 크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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