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삭감 후폭풍
매년 10월 초는 전 세계 과학자들의 시선이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쏠리는 시기이다. 물리·생리의학·화학 세 분야의 올해 수상자 8명 중 우리나라 과학자는 없다. 아직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매년 노벨상 수상자 발표시기가 오면 ‘우리나라 연구자 중 누가 수상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가 등장하고 수상자 발표가 끝나면 ‘왜 우리나라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분석 기사 게재가 반복되어 왔다.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보다 조용하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보다 더 큰 이슈가 과학기술계를 덮쳤기 때문이다. 바로 지난 8월 22일 발표된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예산(안)’과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이다. 정부는 ‘지난 정부에서 무려 10조 원이 증가한 R&D 예산 속에서 안일함과 기득권만 자라났기에 그동안 누적된 비효율을 걷어내고 예산과 제도를 혁신하여 이권 카르텔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올해보다 16.6%가 감액된 25조9000억 원을 내년도 정부 R&D 예산으로 발표했다. 또 내년부터 각 부처에서 평가하는 대상사업에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하고 하위 20% 사업은 의무적으로 구조조정하도록 하는 등의 지속적인 사업 구조조정을 예고하는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도 함께 발표했다.
과학기술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온 우리나라에서 33년 만에 처음 있는 R&D예산 삭감은 과학기술 현장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내년에 새롭게 시작될 신규사업과 전략 분야에 대한 예산 증액분을 감안하면 기존 사업 중 국가전략기술이 아닌 분야에 대한 삭감은 20% 이상이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기초나 비인기 분야는 연구실 유지 자체를 고민해야 할 수준이 될 것이란 걱정이 커지고 있다. 또 사업비 축소에 따른 인건비 감소는 위촉연구원, 대학원생 등 연구개발 수련인력의 이탈을 심화시켜 연구 현장 전반에 걸친 안정성 저하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과학 지출 챔피언 한국, 삭감을 제안하다’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에서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으로 많은 연구자가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을 전 세계 연구자에 전했다.
이러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지난 9월 5일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 등 10여 개 단체가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를 출범시키고 정부의 예산삭감과 R&D제도 혁신방안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은퇴한 과학기술 원로와 여러 단체도 계속적으로 반대성명을 내고 있다. 과학기술계가 이처럼 반발하는 것은 단지 예산삭감의 폭이 커서가 아니라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카르텔로 매도하고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예산삭감을 강행한 과정 때문이다.
원래 국가연구개발사업예산 배분조정(안)은 과학기술기본법에 의해 6월 30일까지 확정지어야 했다. 그런데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고 국제협력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 이후 갑자기 구조조정이 실시되었다. 정부가 위촉한 전문가들이 수개월 동안 만든 예산 배분조정(안)은 부처별로 10% 이상 삭감하여 글로벌 R&D, 국가전략기술 등에 재투자하도록 하는, 4일 만에 만들어진 재조정(안)에 의해 무시되었다. 과학기술계 전체를 카르텔인 것처럼 규정짓고,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만들어 낸 정부 R&D제도 혁신방안은 혁신의 주체인 연구자를 혁신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처 입은 연구자들이 사회와 국가의 혁신과 성장에 필요한 연구개발 활동에 매진할 수 있을까? 그들은 또 사회적 사명감에 주어진 임무를 다하겠지만 상처 입은 마음으로는 정부가 바라는 효율성 높은 연구는 힘들 것이다. R&D와 과학기술인은 국가발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체이다. 정부가 말하는 ‘혁신·도전의 선도형 R&D 시스템으로 대전환’ 하고자 한다면 연구자가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전문가로서의 자존감을 가지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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