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다이너마이트와 원자폭탄
매년 10월이 되면 노벨상 수상자 발표로 떠들썩하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이 탄생한 건 1876년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노벨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폭발해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 기존 액체 폭탄 나이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e)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개량했다. 해저에 퇴적된 규조토를 이용해 폭탄을 만든 것이다. 불을 붙이면 다이너마이트는 순식간에 질소 기체로 분해되면서 폭발한다.
다이너마이트는 험준한 산속을 지나는 터널을 뚫거나 도로 철도 댐 등 여러 시설을 건설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금세 악용되었는데 전쟁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도 쓰인 것이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노벨은 ‘죽음의 상인’으로 불렸다. 그는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되었다고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후 폭탄 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20세기 초 TNT(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가 도입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섭씨 2500도의 고열을 내뿜는 소이탄이 사용되었다. 소이탄은 폭탄에 불이 잘 붙게 하는 알루미늄과 철이 첨가된 신무기로 콘크리트와 강철을 녹일 만큼 강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은 일본 본토를 공습하기 위해 소이탄을 개량한 네이팜탄을 대량 투하했다. 일본인 대다수가 목조 가옥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무를 잘 태우기 위해 고안된 네이팜탄이 떨어지면 주변 지역이 불바다가 되었다.
1943년 미국 서부 뉴멕시코 사막에서는 비밀병기 개발이 한창이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해 양자역학의 스타 과학자가 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은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얻기 전에 미국이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장 하이젠베르크의 대항마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넘어온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를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 불러 모았다.
자연에 있는 제일 크고 무거운 원소 우라늄은 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 수가 가장 많다. 우라늄에 중성자 1개를 충돌시키면 바륨과 크립톤으로 쪼개지는데 이때 일어나는 연쇄반응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우라늄의 동위원소 235가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농축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 핵분열을 일으키는 또 다른 물질로 플루토늄이 있다. 핵 처리 후 인공적으로 얻은 플루토늄 239가 원료다. 핵실험이 성공하자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 개발로 승승장구한 노벨과 달리 오펜하이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원자폭탄보다 1000배나 강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자 미국 정부의 적이 되었다.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천재 과학자라는 찬사는 사라지고 청문회장에 끌려다니며 여론몰이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미국을 강타한 매카시즘(극단적인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노벨은 노벨상으로 자신의 이미지 쇄신에 성공했지만, 오펜하이머는 군축과 평화를 주장하다가 삶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업적에 안주할 수 있었음에도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나치와의 경쟁으로 폭탄 제작에 나섰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가 돌이킬 수 없는 인명피해를 일으키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자기 손에 피가 아직 묻은 것 같다는 오펜하이머의 말이 트루먼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인도의 현자 간디는 7가지 사회악을 지적했다. 그중 하나가 ‘인간성 없는 과학’이다. 모바일 인공지능 방사능물질 등 과학기술이 우리 삶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과학의 힘이 날로 커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미를 잃기 쉽다. 끝까지 소신과 가치관을 고수해 인간성을 지키려고 한 오펜하이머가 매력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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