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제치고 받은 3년 연속 가수왕 상패 “오빠 아직 살아있다”

윤수정 기자 2023. 10. 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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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23] 가수 남진
남진은 "가수 인생을 돌아보면 사람 운명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본래 영화배우를 꿈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신입생 때 한 노래주점에서 팝송이 들려 들어갔고, 얼떨결에 노래까지 했다. 그곳 밴드 마스터 눈에 들어 작곡가를 소개받았고 가수로 데뷔했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경기도 분당 남진(77)의 자택 거실 벽면에는 세 장의 금빛 디스크가 걸려 있다. 그가 1971~1973년 3년 연속 차지했던 ‘MBC 10대 가수 청백전(10대 가수 가요제 전신)’ 가수왕 상패. 그가 이 상패를 두고 벌인 나훈아와의 경쟁은 1970년대 한국 대중가요사에 활력을 불어넣은 ‘보물’이었다. “수백억을 들여도 결코 만들 수 없는 관계가 자동으로 주어졌으니 훈아와 나, 우린 참 운이 좋았죠. DJ(김대중)와 YS(김영삼) 관계가 한국 정치를 더 흥미롭게 만들고 발전시켰듯, 나와 훈아도 역사적 경쟁 관계로 꼽히며 가요계에 재미를 더했으니까요.”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 상패/남진 제공

◇엘비스를 입은 트로트 가수

남진의 최전성기 시절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도 불린다. 그가 데뷔한 1965년에는 미8군 주둔 부대 문화의 유입으로 엘비스 등 미국 팝스타들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엘비스를 닮은 남진의 무대 의상, 외모, 다리를 달달 떠는 춤, 노래 실력도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남진이 미국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의상을 공수해 와 각종 전기 조명을 붙여 입고 오른 1973년 ‘아세아 극장’ 쇼 무대도 큰 화제였다. 의상 가격은 25만원, 당시 쌀 열 가마니를 살 수 있을 만큼 비싼 수준이었다. “사실 그거 입고 감전될 뻔해 당시엔 아주 혼났죠. 하하.”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옷을 입은 전성기의 남진.

남진 스스로에겐 엘비스의 복장이 ‘음악적 뿌리’의 표현이었다. 그는 “트로트만이 아닌 팝송 등 여러 장르를 잘 부른 게 내 인기의 비결이었다”고 회상했다. ‘빈잔’ ‘가슴 아프게’ 등 “내 히트곡들을 잘 들여다보면 트로트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바탕에 뒀다”고 했다. “군부 정권이 이어지다 보니 제목에서라도 왜색풍이 나오면 바로 금지곡이 되던 시절이었어요. 반면 ‘님과 함께’는 한국의 고속 경제 성장 배경이 담겼고, 왜색과 거리 멀었죠. 사실상 건전 가요, 국가로서는 근로를 장려하는 최고의 효자곡 아니었을까요?”

1970년대 라이벌 가수로 꼽힌 나훈아(왼쪽)와 남진. /남진 제공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끈 노래는 팝송이었다. ‘전라도에서 세금 제일 많이 내던 목포 집’으로 불릴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축음기를 판이 닳도록 돌려가며 엘비스, 냇 킹 콜 등 팝송에 푹 빠져 살았다. 하지만 그를 스타덤에 올린 건 정작 “내 취향이 아니다”라며 음반에서 빼려 했던 트로트풍의 2집 수록곡 ‘울려고 내가 왔나’였다. 대표 활동곡으로 팝송 스타일의 ‘연애 0번지’를 밀었지만 반응이 시들했고, “0번지 제목이 수상하고 가사가 외설적이라며 금지곡이 됐다”고 했다. 집에서는 가수 활동을 반대했다. 제5대 국회의원과 목포일보 발행인을 지낸 아버지(김문옥)가 병석에 있다가 아들의 가수 데뷔 사실을 TV로 접한 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놈아, 하고 많은 직업 중에 할 게 없어서 풍각쟁이냐. 이 말씀 뒤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죠. ‘그래도 내 갈 길은 가수’란 생각에 포기하지 않았어요.”

2023년 9월 11일 경기도 정자동 인근 한 카페. 가수 남진이 본지와 인터뷰 중 포즈를 취했다. /김지호 기자

◇월남으로 향한 인기 가수

2집 성공으로 남진은 1968년 연예인 고액 납세자 명단에서 이미자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남진은 그해 갑자기 해병대에 입대했고, 청룡부대를 거쳐 베트남전 파병을 자원했다. “입대 직전에 일본으로 MBC 드라마 촬영을 갔다가 크게 개안을 한 게 계기였죠. 당시만 해도 차 생산이 적어 한산했던 한국 도로와 달리 일본 도로에는 차가 빽빽하게 달리고 있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그걸 보고 더 넓은 세계로 나가봐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군 미필자는 출국 자체가 어려웠던 때이니….” 그렇게 떠난 월남의 전장은 “자고 일어나면 한두 놈씩 없어지고 곳곳에 실탄과 수류탄이 널린 혹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편하게만 살았던 내게 세상 보는 눈을 달라지게 했다”고 했다.

베트남 파병 당시 20대 남진(왼쪽에서 둘째)과 전우들. /남진 제공

베트남에서 3년가량 이어진 그의 공백기는 최대 라이벌인 ‘나훈아’가 무럭무럭 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남진은 군입대 직전인 1968년 남산야외음악당 앞에서 나훈아와 마주쳤고, “첫인상이 까무잡잡한 고등학생 같았다”고 했다. “‘님 그리워’의 작곡가 심형석씨가 요즘 꼬마 하나를 키우고 있다며 소개해 줬죠. 그런데 돌아와 보니 인기가 많아졌더라고.”

남진은 월남에서 제대한 직후인 1971년 국내 가수 최초로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해 10월 나훈아도 연이어 리사이틀을 열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어 3년 연속 남진은 MBC 최고 가수상을 휩쓸고, 그를 뒤쫓는 나훈아와의 경쟁 구도가 화제가 됐다. 남진의 1971·73년 TBC 남자가수 대상 수상도 1972년 한 차례 나훈아의 수상 이후 탈환한 것으로 팬들의 응원전을 더욱 가열시켰다. 남진의 표현으로 “우리가 저물고, 조용필이 뜨던 1980년대”에조차 언론사들은 두 사람을 비교한 표를 첨부해 칼럼을 내놓았다. 때로는 경쟁 열기가 과열돼 남진의 팬을 자처했던 괴한이 나훈아를 무대 위에서 습격하고, 남진의 고향집에 불을 지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당시 내가 시켰다는 의심을 받아 검찰 특수부까지 가서 조사까지 받았어요. 범인 진술서가 엉터리였고, 내 말이 맞다는 게 금세 확인돼 당일에 바로 풀려나 귀가했죠. 훈아는 고향이 부산, 나는 목포. 비교할 것이 참 많아요. 참 기가 막히게 맺어진 라이벌이죠.”

◇대한민국 최초의 팬클럽 탄생

가수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자신의 곡 이름을 딴 작품 등 60여 편 넘게 출연한 남진의 인기는 국내 최초로 ‘오빠 부대’를 탄생시켰다. 그가 1972년 남이섬에서 7000여명과 가진 팬미팅은 국내 기록된 ‘최초의 팬클럽 행사’다. “당시 전세 버스 수십 대를 대절해 팬들이 오는 광경이 장관이었죠.” 팬클럽 전체 회원수는 15만 명까지 달했다.

1972년 남진 팬클럽 모임 공고문. /남진 제공
남진이 서울 헌인릉에서 가진 팬클럽 정기모임회를 상세히 보도한 당시 기사 스크랩 자료. 당시 이 모임회는 '빽차'로 불리던 경찰차 호위를 받으며 남진이 탄 차가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팬들이 탄 전세버스 수십 대가 '팬클럽 주제가'를 울리며 따라가 화제가 됐다. 1963년부터 이어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헌인릉의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에서 지금의 '서울 서초구'로 변경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동안 혼선이 빚어졌던 당시 상황이 팬클럽 공고문과 관련 기사 속 '경기도 광주 소재 헌인능' 표현으로 남아 있다. /남진 제공

오는 14일부터 부산 벡스코오디토리움을 시작으로 광주, 전주, 부천, 대전, 청주, 대구, 울산, 서울 등 1년 간 전국 12개 도시에서 개최하는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 제목을 “오빠 아직 살아있다”로 지었다. “팬데믹 기간 가장 그리웠던 소리가 팬들의 ‘오빠’였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가수와 매니저, 공연기획자로 끈끈한 인연을 맺어온 소속사 에스피에스 이시찬 대표가 직접 기획을 맡은 이번 전국 투어에선 구슬픈 이별 가사에 애달픈 목소리를 얹은 ‘이별도 내 것’, 처음 라틴 재즈 댄스곡에 도전한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등 지난달 발매한 최신곡들도 선보인다. 공교롭게도 오는 연말 나훈아도 단독 공연을 열면서 또 다시 같은 기간 공연 대결을 펼치게 됐다.

남진은 특히 “팬들로부터 기념품들을 기증받아 전남 고흥군에 ‘남진 가요기념관’ 설립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내 소장품들은 정작 내 손에 하나도 없어요. ‘가수 남진’의 60년 인생은 결국 모두 팬들이 ‘삶’으로 만들어 준 것이죠. 이제는 그 삶을 잘, 멋있게 마무리하는 게 내 마지막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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