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룡의 시선(詩線)] ③ 세상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어요
키르기스스탄 알틴 아라샨
침엽수림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줄기·톈산산맥에서 내려온계곡물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
러시아곡 ‘아무르강의 물결’
애잔한 선율에 감흥 일어
스무해 전이었다. 고3 수업을 맡았다. 첫 수업, 몇분 지나지 않았는데 맨 뒤에 앉아 팔베개를 하고 자는 아이가 있다. 깨웠다.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깨웠다. 아이들이 말한다. “걔 2학년 때도 그랬어요. 안 일어나요.” 그다음 시간에도 깨웠다. 일어나지 않았다. 3월 한달 깨워보다가 서서히 무심해졌다.
4월 중순 수업에 문화 단원이 있었다. 교재재구성으로 2학기 전통문화 단원을 묶어 수업했다. 이준호 작곡, 정수년 연주의 해금 연주곡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를 들려줬다. 이준호 작곡가가 설악산을 등반하고 소청 산장에 하룻밤을 머물 때 그곳 풍경에 반해 작곡한 곡이다.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를 들려주고 얼마쯤 지났을까 그 아이가 턱을 괴고 듣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복도로 따라와 묻는다. “선생님! 시디 좀 빌려줄 수 있어요?” “다른 반 수업이 아직 남았는데, 삼사일 뒤에 빌려줄게.” 당시는 아이들에게 음악이나 음성자료를 들려줄 때 카세트테이프를 넣을 수 있는 시디플레이어를 쓰던 때였다. “연주곡이 마음에 들었어?” 아이가 쑥스럽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지금도 이 얘기를 하면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고3 남자아이가, 평소 엎드려 ‘수면’을 일상화하던 아이가 이런 말을. 이 일을 다른 학교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설마? 그런 말을 했다고요?”라고 뻥 친다는(?) 투로 말하는 분이 많았다. 그 아이를 아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걔한테 그런 면이? 이제부터 다시 봐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음반 말고도 몇개 더 빌려줬다. 당시 40여분 통근을 했기에 차 안에서 ‘슬기둥’ 음반을 열심히 듣던 때였다. 다음날 아이가 음반을 가지고 왔다. “벌써 다 들었어?” “엠피쓰리 파일로 옮겼어요.” 그때 음반을 mp3 파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음 수업부터 아이가 졸지 않으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고개를 몇번 앞뒤로 끄덕이다 책상에 머리를 묻었다. 오랜 습관의 내성에서 쉽게 풀려나지는 못했지만 나름 애쓰는 모습이었다.
졸업식을 맞이했다. 아이가 음료수를 손에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다, 고맙다고 했다. 졸업식 끝나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 바쁜 데 음료수를 주고 가는 마음에 아이도 나도 모두 대견(!)했다.
키르기스스탄 알틴 아라샨, 2박 3일 산행에 오른다. 하늘 높이 뻗은 가문비나무, 그 옆을 계곡물이 흐른다. 물소리 시원하다. 끝없는 목초지에는 소와 말,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는다. 걸음마다 야생화가 작고 낮은 몸으로 맞이한다.
알틴 아라샨 민박촌으로 가는 길, 간혹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구소련 군용차량을 개조한 ‘푸르공’, 지프차를 타고 간다. 나는 크고 작은 돌이 가득한 비포장 길을 걸어갔다. 낮은 오르막 10㎞ 거리라 설악산 대청봉보다 시간이 적게 걸릴 거고, 차가 오간다는 것은 경사가 심하지 않다는 것, 가장 큰 이유는 자연을 느끼며 걷고 싶었다.
약한 오르막이기에 숨이 차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었다. 침엽수림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줄기와 톈산산맥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끝없이 이어졌다. 설산과 계곡물 색이 닮았다. 아름다운 산행을 하고 있다는 행복감에 젖었다. 풍경을 사진에 담고,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사회 교사였기에 다른 나라를 가면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를 다니는 걸 좋아했다. 알틴 아라샨 길을 걸으며 풍경에도 관심의 영역이 넓어졌다. 눈 돌리는 곳마다 눈길을 빼앗겨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길을 아끼며 걸었다.
잠시 쉴 때, 옆 휴대폰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음악을 튼 분이 러시아 곡 ‘아무르강의 물결’이라고 알려줬다. 애잔한 선율이 감흥을 돋웠다. 그곳에서 활동했던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가 생각났다.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적백내전 때 스러져 아무르강에 버려졌다. 그녀는 총살 전, 열세걸음을 걷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선 13도의 영원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해 달라”는 말과 함께 열세 걸음을 걷고 최후를 맞았다.
숙소가 바라보이는 산길에 오르자 저 멀리 흰 사각 텐트를 펼쳐 넣은 듯한 설산 ‘텐트마운틴’이 맞는다. 텐트마운틴의 ‘눈’과 마주쳤다. 많은 나라를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본 외국의 풍경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웠다. 키르기스스탄 알틴 아라샨에서, 2002년 그 아이의 말을 닮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어요.”
◇최승룡= 중등사회교사, 강원도교육청 대변인, 교육과정과장, 강원도교육연수원장으로 일했다. 실크로드, 유라시아에 호기심이 많아 이곳을 안내하는 책, 여행을 좋아한다. 8월 중순∼9월 말 중앙아시아 몇 나라를 여행하며 이곳의 지리와 문화, 우리와의 친연성을 6차례의 연재를 통해 강원도민일보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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