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무엇을 기억하게 가르치지? 홍범도의 삶과 육사
홍범도는
왕조에서 제국으로
이어 식민지, 사회주의로
세상이 바뀌어도
좌절하지 않고
굳센 삶을 살았다
‘고려 독립’을 희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내세운
독립운동가다
육사가 육성해야 할
진정한 정예장교는
바른 가치관·도덕적 품성
우선 갖춘 군사전문가다
그렇지 않은 장교는
군사기술자로 공동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지난 8월25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등은 기자회견을 열고 육군사관학교 측에서 독립영웅 5명의 흉상을 학교 밖으로 옮길 계획을 비판했다. 이들이 보기에 육사 측의 계획은 국군의 역사적 기원을 뒤집어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고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반헌법적 처사”였다. 이에 국방부는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홍범도의 흉상만이라도 학교 밖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고수했다. 그러면서 홍범도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 볼셰비키와 가해자 측에 가담했고,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한마디로 반공을 대전제로 해야 하는 육군사관학교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과 사실을 먼저 제대로 이해하면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단정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우면 이는 거슬러 올라가는 접근방식으로 결과에 꿰맞추어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이다. 그러면 사실과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는 역사 이해의 대전제가 무너진다. 특정 목적에 이용할 우려가 매우 깊고 북한의 역사 접근법과 하등 다르지 않다.
자유시 참변 후 진상 규명·가해자 처벌 요구
1920년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연이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무기 보급과 건강 회복 그리고 조직을 정비할 안정된 공간이 필요했다. 더 강력한 독립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이르쿠츠크부터 연해주 사이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무장부대와도 연합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무장부대에서 통합에 주도적인 사람들은 부대 편성을 위한 절차의 하나로 무장해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서로 합의하지 않은 채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가해 측은 참변 5개월 후인 11월27일부터 나흘 동안 피해자들을 처벌하는 법정을 열었다. 홍범도는 참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참변 후 통합 부대로 결성된 ‘특립 고려여단’의 제1대대장인 데다, 여단의 단장이 국제공산당에서 보낸 러시아인이어서 합당한 정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가해 측은 판결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홍범도의 명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홍범도는 이때 이미 참변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기 한 달 전 허재욱과 이병채가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참변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도록 요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허재욱은 참변의 현장에서 죽은 사람 대부분이 소속된 의군부 책임자였고, 이병채는 홍범도 부대의 참모였다. 더구나 홍범도는 재판이 끝난 직후인 12월14일에 27명의 독립군 지도자와 함께 한국독립군 통합위원회의 이름으로 러시아공화국의 당과 군대의 최고 기관 그리고 국제공산당 집행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자 전권자를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홍범도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도 참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회의에는 초대받지 못한 찬밥신세였는데, 볼셰비키가 조선독립을 지지한 결과였다. 그는 대회 직후인 같은 해 2월에 최진동과 함께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조선 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참변을 일으킨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국제공산당 파견원인 슈미야츠키, 이르쿠츠크파의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 김철훈을 ‘4000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요구했다.
보고서는 또한 그동안 가해자 측이 참변의 진상을 숨기고 책임을 피하고자 연이어 발표한 성명에 동의한 적도 없다며, 자신들이 서명을 거부하면 가해자 측이 임의로 이름을 기입하고 서명을 위조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동지들의 배신자가 되고 그들로부터 경멸받기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처절한 심정을 밝혔다.
소련서의 삶, 고려인 사회서 존경받는 어른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에도 홍범도에게도 전환점이었다. 자세한 연구는 아직 없지만, 국제공산당 등은 참변을 다시 조사하고 재판도 열었다. 특립 고려여단은 1922년 6월쯤 우르칸 금광에서 일하다 이듬해 봄 해산되었다. 독립전쟁을 담당할 무장력에 매우 큰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홍범도 역시 만주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 연해주에 정착해 농사지으며 살았다. 왜 그랬을까.
아홉 살에 고아가 된 홍범도는 생존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다녔다. 의병운동 과정에서 일제에 아내와 맏아들을 잃었지만, 둘째 아들은 1922년 시점까지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식민지 조선은 혈연과 지연이 끊긴 곳이었다.
연고가 취약하기는 북간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홍범도가 북간도에 갔을 때는 청산리전투를 벌이기 1년여 전이었다. 처음에는 이동휘의 소개로 대한국민회와 인연을 맺었고 활동 이력이 쌓이면서 최진동과 함께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경신년대학살을 계기로 북간도 지역의 항일 단체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때부터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이곳에서 무장투쟁은 없었다. 나름 기반이 튼튼했던 김좌진조차 1930년 죽을 때까지 이곳의 활동 기반을 복원하지 못한 사실이 엄중했던 당시의 현실을 말해 준다.
그런데 홍범도는 야학이나 선전활동을 하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총을 들고 싸우던 독립운동가다. 그가 무장투쟁을 벌인 공간은 함경도, 연해주, 북간도였다. 여전히 직업이 ‘28년’ 동안 활약한 ‘의병’이라고 자부하던 홍범도였지만, 1922년을 지나는 시점에 이르면 그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총을 들고 항일 투쟁을 벌일 만한 유의미한 공간은 없었다.
더구나 청산리전투 당시 홍범도의 나이가 52세였다. 1938년쯤 조선인 남성의 평균 수명이 32~34세였으니 그는 매우 장수하고 있던 사람이다. 같이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김좌진과 당시 상해에서 독립전쟁을 구상하고 있던 안창호가 그보다 각각 스물한 살과 열 살 어렸다. 이런 사람이 한국으로 치면 면(面) 단위의 넓이에 가까운 ‘청산리 일대’를 누비며 6일 동안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그곳이 수백m 높이의 산들로 빼곡한 곳임을 생각하면 그의 체력과 독립 의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1922년 즈음에 다시 만주로 돌아가 높은 산들을 누비며 무장투쟁을 하기에는 그도 체력적으로 무리였다고 보는 쪽이 훨씬 자연스러운 시선일 것이다. 이런 홍범도에게 소련의 연해주는 때마침 시베리아 내전도 끝나고 해서 노후를 보낼 안정된 공간이었다. 항일운동 기간만으로 따지면 연해주는 그가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었다. 게다가 낯선 땅이 아닌 그곳이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라고 내세운 신생 국가 소련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하층민 출신인 그에게 천대받지 않는 세계일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안정만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홍범도는 고려인이나 옛 부하들과 같이 농업과 관련한 조합을 만들어 함께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자 나섰다. 이 와중인 1927년 59세에 입당했지만, 독립운동을 적대하거나 일본에 이롭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고려인 사회가 나서서 살아 있는 전설의 의병 활동을 연극으로 제작해 공연할 만큼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파르티잔 경력만으로는 존중받을 수 없는 장면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어른으로 자기 역할에 충실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다.
홍범도는 왕조에서 제국으로, 이어 식민지, 사회주의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바뀌어도 좌절하지 않고 굳센 삶을 살았다. 끝까지 ‘고려 독립’을 희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내세운 독립운동가다. 일신의 영달을 기대한 삶이 아니었기에 민족과 국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원망한 적도 없다. 그가 선택한 삶은 “일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충성”하다 “운 좋게 민족해방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기회를 틈타 슬쩍 행로를” 바꾼 ‘성실한 기회주의자’와 확연히 달랐다. 대한민국 땅에서 독립과 반공을 편의적으로 나눠 분절적으로 기념해도 좋다는 안이한 태도와도 달랐다.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육성해야 할 진정한 정예장교는 “올바른 가치관 및 도덕적 품성”을 우선 갖춘 군사전문가다. 그렇지 않은 장교는 군사기술자로 공동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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