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셰프의 인생 철학…“너무도 슬픈 인터미션” [고승희의 리와인드]
앙코르까지 3시간 15분 10곡 연주
피아니스트 문지영 통역 동반
“관객과의 벽 허무는 음악회”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거장 피아니스트에겐 별칭이 많다. ‘피아니스트의 교과서’,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 상투적이지만, 이러한 수사는 언드라시 시프(70)의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장 찰떡인 별칭은 ‘피아노 셰프’다. 그의 연주는 정해진 프로그램이 없다. 오로지 그날의 분위기와 공연장 환경에 맞춰 레퍼토리를 고른다.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 공연에서도 시프는 ‘최고’의 ‘오마카세(맡김차림)’ 셰프였다.
안드라스 시프의 내한 리사이틀의 마지막 공연이 지난 6일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시프의 마지막 공연은 일찌감치 열기가 뜨거웠다. 금요일 저녁, 극심한 교통 체증을 뚫고 온 관객들이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을 가득 메웠다.
사흘 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그는 “브람스를 칠까 했는데, 지금 보니 이 피아노와 이 홀에선 모차르트를 치는게 더 좋을 것 같다”며 모차르트, 바흐, 슈만을 선곡했다. 경기아트센터에서의 선곡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프로그램은 ‘즉흥’이라고 하지만, 잘 짜여진 수미쌍관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날 시프는 바흐로 시작해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통역을 맡은 피아니스트 문지영은 “선생님은 각 공연마다 떠오르는 대로 선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순환하듯 큰 틀을 구성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귀띔했다.
시프를 ‘피아노 셰프’로 부르는 것은 그의 연주회는 음악 감상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곡 한 곡을 즉석에서 선곡하고, 곡에 얽힌 히스토리와 연주자로서의 해석과 견해를 더한다. 그 이야기는 음악가로의 철학을 넘어 인생 스승이 전하는 삶의 교훈 같다.
마지막 한국 공연은 바흐의 ‘신포니아 9번’으로 시작해 ‘인벤션 15곡’, ‘이탈리안 협주곡’으로 이어졌다. 시프는 ‘바흐 음악의 살아있는 권위자’로 불린다. 바흐 음반으로 ‘그래미 상’을 받은 그에게 바흐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훌륭한 교육자”다. “매일 아침 클라비코드로 바흐를 만나고 식사를 하는 것”은 그의 루틴이다 “바흐의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영혼과 몸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프의 바흐는 정갈하고 우아하다. 오래 탐구해온 곡을 대하듯 명확한 해석을 가지고 품위있게 접근한다. 그러면서도 거장의 여유가 자리한다. 인벤션을 연주하며 그는 페달 사용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바흐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연습곡이기에 피아니스트의 공연에서 연주되는 일이 거의 없는 ‘인벤션’을 거장의 소리로 듣는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시프는 “인벤션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골드베르크 변주곡’부터 치려는 것은 처음 등산을 하면서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작은 언덕에서 시작해 에베레스트로 향해야 위대한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피렌체의 햇살을 고스란히 품은 ‘이탈리안 콘체르토’를 마치고 그는 “바흐가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을 너무나 안타까게 생각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지는 두 곡은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프렐류드와 푸가’와 모차르트의 ‘아다지오’였다. B단조의 두 곡을 함께 연주하는 것에 대해 시프는 “‘이탈리아 콘체르토’가 햇빛 같은 곡이라면 ‘평균율’은 칠흙같은 검은빛, 죽음의 곡으로 마테 수난곡과 비슷하다”며 “모차르트는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을 알고 B단조 곡으로는 이 곡만 남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죽음’을 의미하는 B단조의 두 곡으로 깊은 위로를 안긴 연주를 마치고야 1부가 끝이 났다. 1시간 30분의 대장정이었지만, 시프는 “너무도 슬픈 인터미션”이라고 말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짧은 휴식을 마친 뒤엔 하이든과 베토벤이 이어졌다. 그는 “하이든은 과소평가된 작곡가”라며 “노래하기보다는 말하는 작품을 작곡했고, 도돌이표가 많아 청중에겐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내겐 이전보다 더 잘 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곡”이라고 했다. 하이든의 ‘소나타 20번 in C단조’는 지루할 틈 없이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놀람과 고요함의 대비를 느껴보라”고 했던 셰프의 의도가 고스란히 와닿았고, 맑지만 가볍지 않은 피아노 음색이 풍부하게 더해졌다.
이날 음악회는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곡으로 시작해 한 단계, 한 단계 걸음을 옮겼고, “마스터(하이든)로 향한 뒤 다시 학생으로 넘어가는” 순서를 밟았다. 하이든 뒤로 베토벤이 배치된 이유다.
베토벤의 ‘발트슈타인’에 대해 시프는 “잘 알려진 곡이나, 이 곡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며 “먼지를 제거하듯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우고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든의 제자인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곡의 구조를 짜고 모티프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이전에는 없던 독창적인 형식을 써냈다. 시프를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며 아름다운 페달링으로 건조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을 촉촉하게 적셨다.
시프의 내한공연에서 통역을 맡은 문지영에게도 이번 일정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는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지 믿기지 않을 만큼 황홀경에 빠져있었다”며 “특히 첫 공연에선 너무나 떨려 얼음장 같이 질려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것을 감지하고 제 눈을 보고 설명해주셔서 무척 감동적이었다”는 후기를 들려줬다.
무엇보다 문지영의 통역을 통해 거장의 생각이 차분하고 충실하게 전달됐다. 문지영은 “지난 일 년동안 자주 뵈며 음악의 결을 이해하고 있어 선생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며 “선생님께선 요즘 공연이 너무 딱딱하고 틀에 박혀 있다고 보셔서 관객과의 벽을 허물고 싶다는 마음이 크시다. 그래서 곡에 대한 설명과 함께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곁들이는 렉처 콘서트를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무려 3시간이 넘는 공연을 하면서도 시프는 지치는 기색도 없었다. 세 곡의 앙코르가 이어졌다. 이날의 백미는 버르토크의 ‘론도’였다. 시프는 “지금은 고향인 헝가리에 가지 않지만, 이 곡을 연주할 땐 언제나 고향에 와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내한 일정 중 경기아트센터에서만 선보인 ‘론도’의 선곡은 더 특별했다. 마지막 공연이라는 상징성과 다시 돌아오겠다는 거장의 메시지가 담긴 선곡으로 들렸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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