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우리말의 위기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공상과학(SF) 소설이 대세다. 화제작이 많아 연휴 중 몇편 읽었다. 참신한 상상력과 뚜렷한 주제의식, 탄탄한 스토리는 물론 소수자와 다양성에 주목하는 따뜻한 시선까지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맞서 싸우거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던진 뒤로 우리 소설이 얼마나 다채롭고 생생해졌는지 새삼 놀랐다. 역설적이지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문학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 같기도 하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창작인데도 문장이 번역문처럼 읽혔다. 요구된다, 포함된다, 해당된다, 제공된다, 가족 구성원 등은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억지스럽게 옮겨졌거나 불필요하게 끼어든 표현이 굳어진 것이다. 문장 구조도 그렇다. 영어의 ‘물주구문’을 그대로 옮긴 듯한 ‘~ 보이게 했다’, ‘~ 의심하게 했다’가 이어지고, 많은 문장의 서술부가 ‘~것’으로 끝난다. 예컨대 ‘왜 거기에 갔을까?’라고 하지 않고 ‘왜 거기에 갔던 것일까’라고 쓴다. 동사나 형용사로 서술하지 않고, 일단 명사로 받은 뒤 문장을 마친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쓰는 격이다. 나는 무척 불편하고 어색한데 독자 서평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분명 우리말은 변하고 있다. 우리말은 본디 이렇다고 아무리 외쳐봐야 흐름을 막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의아할 뿐이다. ‘왜 이해 잘되는 문장을 공연히 꼬투리 잡고 그래?’ 언어는 변한다. 변해야 한다. 언어에 있어 ‘본디’는 없다. 모든 문화 현상이 그렇다. 문화사를 돌아보면 가치 있는 것은 대개 교류와 융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교류를 하든 융합을 하든 좋은 우리말, 아름다운 우리말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벌써 몇주째 ‘일리아드’의 새로운 영어 번역본에 대한 분석, 대담, 특집이 이어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서양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고전이다. ‘일리아드’ 번역본만 100종이 넘는다. 그런데도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면 관심이 뜨겁고 대중매체까지 앞다퉈 기사로 다룬다. 영어 번역본 중 최고로 꼽히는 알렉산더 포프의 1713년판 ‘일리아드’ 역시 그때마다 회자된다. 그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었던 포프는 번역에 꼬박 7년을 바쳤다. ‘일리아드’가 1만5천행쯤 되니 하루에 6행씩 옮긴 셈이다. 고작 시 여섯줄 번역하는 데 온종일 걸리다니! 포프는 의미만 옮긴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애초 문자기록이 아니라 구전되던 시가(詩歌)다. 그리스어 원본은 기나긴 작품을 기억하기 쉽게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시종일관 5음보를 유지하면서, 예컨대 엄청난 대군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장면에서는 우르릉 파도치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음소를 연달아 배치했다. 포프는 이런 음악적 효과와 리듬까지 살려 번역문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역작을 써냈다. 그 결과 영어의 풍요로움에 크게 기여했다.
한글날이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시기 전에도 우리말은 있었다. 그러나 알기 쉽고 과학적인 표기체계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꿈을 담은 글을 쓸 수 있었기에 한국어라는 언어가 지금처럼 풍부해졌다. 안타깝게도 우리말은 위기를 맞고 있다. 영어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모든 것이 휩쓸리는 판국이다. 의학·과학 분야에서는 첨단 개념이나 기술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제 논문을 한글로 쓰는 일이 드무니 한글 번역어도 필요 없는 것이다.
과학 분야만이 아니다. 출판계에서는 인문, 사회, 자기계발, 심리 어느 쪽을 봐도 조잡한 번역어가 난무한다. 책으로 출판된 단어는 일정한 권위를 갖기에 질 낮은 번역어는 신문 기사에서 정부 문서까지, 웹페이지에서 촉망받는 작가의 에스에프 소설까지 사방으로 퍼진다. 우리는 세계에서 번역서 비중이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나라다. 번역을 보살피지 않으면 우리말 가꾸기는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 문제도 하루가 멀다고 막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생각하면 암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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