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현금이 왕`인 시대
지난 봄께 지인의 소개로 국내 빌딩 중개업계 1세대로 불리는 부동산 브로커를 만났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금리 인상에도 증시나 부동산 시장 모두 나쁘지 않다는 기자의 말에 오랜 기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말했다. "원래 한 1년은 버팁니다. 금리 인상 사이클이 시작하고 1년에서 1년 반? 신용대출을 받아서라도 자산을 지키려고 하지요. 사람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공실이 발생하고 차입금에 대한 은행 이자는 매월 오르고... 결국은 한계에 도달해 던질(매도) 때가 옵니다."
금리 인상의 효과는 시차를 두고 나타날 것이란 요지의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올해 가을부터는 고금리의 고통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Fed)는 지난해 3월부터 기준금리를 무려 11번 올려 현재 연 5.25%-5.5%까지 왔다. 2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기준금리는 연 3.5%다. 한미 금리 차이는 2%포인트(p)로, 이 역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준이다.
최근 미국 국채 장기물의 금리가 급격히 오르며 시장이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흔히 미국 장기 국채를 '무위험채권'이라고 부른다. 대적할 상대 없는 경제대국 미국 재무부가 발행해, 건국 이후 채무불이행이 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신용 면에서 여타 국공채와도 비교할 수 없고 금(gold)과 비견되는 자산이 이 미국채다.
지난 3일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 국채 금리가 16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인 4.81%로 치솟았다. 다음날인 4일에는 그보다 높은 4.88%까지 더 뛰었다. 30년 국채는 4.95%까지 올라 5%대를 코 앞에 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8월 이후 최고치다. 전세계 주식과 채권시장이 동반 급락하고 달러 가치는 급등했다. 올해 5월 초까지만 해도 3%대 초반에 머물렀던 미국채 금리는 8월 이후 상승하며 증시를 짓눌렀다. 연준의 금리 인상이 7월을 마지막으로 이미 끝났다고 한 이후 도리어 시장은 금리 인상의 공포에 휩싸였다.
미국채의 금리(수익률) 급등이 무슨 의미이길래 시장이 이처럼 동요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 미국채는 무위험 채권이다. 무위험 채권의 수익률이 오르며 고위험 채권 수익률보다 높아진다는 것은 돈이 일반 기업이나 금융기관으로 돌지 않는다는 말이다. 리스크가 축적된 상황에서는 금융위기의 방아쇠가 될 지 모른다.
국제 유가 상승으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다시 고개를 들고, 기록적인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기가 식지않자 연준이 고금리를 더 오래 유지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피치가 국가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등 체면을 구긴 이후에도 미국 연방정부는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재무부는 커지는 적자를 감당하기 위해 채권을 추가 발행하고 그로 인한 이자가 증가하면서 적자가 다시 커진다. 미국채 시장의 '큰손' 중국과 일본도 저마다의 사정으로 미국채를 매도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경제방송 CNBC의 편집장 릭 산텔리는 10년물 미국채 금리가 7년 내에 13~14%에 도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놀랍게도 폴 볼커 시절의 미국채 장기물 수익률이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지만, 그의 말이 현실화하면 현금으로만 13~14%의 수익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온다. 현금만 있으면 수익이 나는데 주식이나 코인 같은 위험 자산에 투자하기는 어렵다. 조달비용이 늘어나므로 부동산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서울 경매 시장에선 유찰된 아파트 매물이 쌓이고 있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경매 진행 건수는 200건을 돌파하며 7년여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달 기준 5대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상품 변동 금리는 연 4.27~7.099%다. 최고금리는 7%를 넘어섰다
고금리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현금 흐름이 불투명해진 기업과 개인들이 자산을 처분해 부채를 상환하고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미국 리도 어드바이저스의 지나 산체스 수석 시장 전략가는 "금리 인상기엔 현금이 왕"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외신 인터뷰를 통해 "과거 경기침체를 예측하며 국채 수익률 곡선이 오랫동안 역전돼 있었으므로 경제가 조금 둔화하더라도 결국 단기물 국채금리는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며 "정상적인 모양의 국채 수익률 곡선을 갖기 위해서는 장기물 국채금리가 올라와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인플레이션을 지나자마자 맞닥뜨린 '현금이 왕'인 시대, 이제 투자 상품은 예·적금과 경쟁해야 한다.
그렇다고 당장 실거주 중인 아파트를 처분하고 현금을 확보하라는 뜻은 아니다. 단기적으로 현금성 자산과 단기 채권 등 현금의 수익률이 높다 해도 장기적으로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투자를 놓고 싶지 않다면 부채보다 현금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재무구조가 건전한 기업을 주목해 살펴보면 어떨까. 앞으로도 금리가 얼마나 오를지, 오른 상태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그 결과는 어떤 모습이 돼 우리 앞에 나타날지 등등. 안전띠를 바짝 조여 매고 전방을 주시하자.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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