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의 일본 탐구 <41> 日 지역 경제 살리는 향토 니혼슈 기업] 세계적 ‘사케 붐’ 비결, 대를 잇는 직업 정신
맥주, 위스키 등 서양 주류가 들어오기 이전까지 일본인은 쌀로 빚은 ‘니혼슈(日本酒)’를 즐겨 마셨다. 그래서 술(酒)의 일본 발음인 ‘사케’라고 하면, 전통주인 니혼슈를 의미했다. 요즘 니혼슈는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유럽에서도 찾는 사람이 많다.
니혼슈는 일본의 자연과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특성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술이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는 데도 니혼슈가 한몫하고 있다. 깊은 산촌이나 농촌에 자리 잡은 사카구라(酒藏·양조장)는 고용과 소득 증대에도 기여한다. 인구 감소와 함께 지방 소멸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시기에 니혼슈 업체들이 일본 사회 안정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9월 6~9일 일본 혼슈(본섬) 서쪽 끝에 있는 야마구치현의 사카구라와 사케 카페를 답사했다. 니혼슈가 코로나19 위기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비결을 찾아봤다.
나가야마 사장이 두 번 울먹인 까닭
야마구치(山口)는 일본 근대화, 산업화의 본고장이다. 메이지유신의 발상지로, 중세부터 서경(서쪽 수도)으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야마구치현 산요오노다에 위치한 나가야마(永山)주조는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니혼슈 브랜드 ‘오토코 야마(男山)’와 ‘야마자루(山猿)’를 생산하는 업체다.
창업 5세대인 나가야마 준이치로 사장은 사카구라를 찾은 한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회사 설명을 하는 도중 두 차례나 눈물을 흘렸다.
나가야마 사장은 “1887년 창업한 나가야마주조의 선조는 1300년대에 조선반도(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밝히며 잠시 울먹였다. 방문객 가운데 한 명이 자식에게 사카구라를 전수할 계획이냐고 묻자 “회사를 더 키우자며 열심히 일하던 아들이 얼마 전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가업을 이을 후계자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
나가야마주조는 창업 30여 년 뒤인 1919년 교토에서 열린 니혼슈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전국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다. 1978년 도쿄에 진출했으며, 1996년 와인 시장에도 신규 진출했다. 지난 2002년 새로 내놓은 브랜드 야마자루가 전국 신주(新酒) 감평회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받는 등 꾸준히 성장하는 니혼슈 메이커다.
올해로 취임 25년째를 맞은 나가야마 사장은 소비자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술 만들기를 항상 강조한다. 니혼슈 제조에 들어가는 쌀 전량을 인근 지역 농가와 장기 계약을 맺고 생산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회사 비전에 대해 “농가와 함께 지역의 자부심이 되는 쌀 품종을 창조하는 주류 업체가 되고 싶다”며 “술을 만드는 것은 농업이며, 만드는 사람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조상의 기술을 전수받아 지금도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삶의 큰 행복”이라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술 회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야치요, 전통에 혁신 입혀 고급화
야마구치현 하기(萩)에는 신세대 술로 주목받는 업체가 있다. 니혼슈 업계에서 드물게 여성이 운영하는 야치요(八千代)주조다. 병과 포장 디자인이 예쁜 니혼슈를 생산하는 업체로 유명하다. 이 업체는 하기 지역에서 물이 좋기로 소문난 가바간이치강 옆에 1887년 첫 사카구라를 열었다. 브랜드명 ‘야치요’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가문이 영원히 번성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야치요는 니혼슈 제조에서 ‘농양일관(農釀一貫)’ 시스템을 고집한다. 회사 이익만을 좇으려면, 술 제조에 들어가는 쌀이나 부속 원료를 외부 전문 업체에서 조달받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지역 경제 지원 차원에서 쌀 재배부터 술 양조까지 전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니혼슈 품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고품질 쌀 ‘야마다 니시키’는 지역 영농법인과 공동 재배하고 있다. 야치요주조의 카바 쿠미코 사장은 “지역 명산에서 흘러내리는 미네랄이 풍부한 복류수를 사용하며, 농약을 적게 쓰고 담백질 함량이 적은 쌀을 원재료로 이용해 고품질 니혼슈 생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창업 4대째 어머니와 딸이 야치요주조를 운영 중이다. 5대 경영을 맡을 딸은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에서 일하다가 2017년 귀향해 현재, 술 제조 책임을 맡고 있다. 카바 사장은 “전통을 지켜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도전해야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며 “20년, 100년 뒤에도 세계인으로부터 인정받는 니혼슈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현대식 사케 카페로 변신…5대째 가업 지켜
요즘 일본에 가면 관광지는 물론 지방 곳곳에 많이 보이는 매장이 ‘사케 카페’다. 기존 주류 전문점에다 카페 형태를 접목한 형태다. 술도 간단히 마시고, 다양한 술을 골라 살 수 있는 점포다.
규슈 북쪽 끝자락 후쿠오카현 기타규슈 모지코에는 메이지 시대의 산업 시설과 역사 유적지, 맛집 등이 몰려 있다. 이곳에서 5대째 영업 중인 ‘SHIMADA酒店(시마다주점)’은 종업원 5명인 소형 매장이지만 사케 카페로 인기를 끄는 곳이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도 매장에는 5대 사장이 부모와 함께 점포 역사와 토종 니혼슈 브랜드를 직접 소개했다. 1882년에 문을 연 시마다주점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멋진 사람들이 항상 편한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기억되는 장소’를 지향하고 있다.
모지코가 고향인 시마다 카즈테루 사장은 야마구치대를 졸업한 후 음료 대기업 이토엔에 취업해 도쿄 등지에서 16년간 근무한 뒤 가업을 잇기 위해 지난 201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케 카페를 맡은 이유를 묻자 “녹차 음료 등을 만드는 이토엔에서 근무할 때 일본 문화를 깊이 이해하게 됐다”며 “지역의 좋은 술 판매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일본 문화를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흔히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많이 소개되는 탓에 국가 이미지가 쇠락하는 쪽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본 경제가 다른 경쟁 선진국에 비해 역동성과 혁신성이 떨어지고, 저성장이 이어지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 3위 경제 대국 위상을 지키고 있고, 다수 국민이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환경 속에 꿋꿋이 향토를 지켜가는 각지의 소기업과 경영자들이 일본 사회를 버텨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Plus Point
니혼슈(日本酒)니혼슈는 쌀을 발효시켜 만든 일본 전통주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日本酒의 일본 현지 발음이 ‘니혼슈’다. 맥주, 와인 등 서양 술이 일본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사케(酒의 일본 발음)’는 니혼슈를 의미했다. 지금도 선술집(이자카야)에 가서 사케를 달라고 하면, 니혼슈를 내준다.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남쪽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국에서 생산되는 니혼슈는 맛이 다 다르다. 쌀과 물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맛의 니혼슈가 만들어진다. 2023년 현재, 1500개 이상의 사카구라(양조장)가 있다.
니혼슈는 쌀을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주세법 기준으론 청주(淸酒)로 분류된다. 청주로 판매할 수 있는 니혼슈의 알코올 도수는 22도 미만(합성 청주의 경우 16도 미만)이다. 니혼슈의 약 50%가 혼슈(본섬)의 중서부 효고현과 교토부에서 양조된다. 닷사이, 야마자루 등이 생산되는 야마구치현에도 품질 좋은 니혼슈가 많다.
원료인 쌀의 정미 비율에 따라 고급 니혼슈와 일반 니혼슈를 가른다. 정미 비율은 현미 중량에서 어느 정도를 깎아내고 백미를 만들었는지를 뜻한다. 정미 비율 60%는 100㎏의 현미를 정미해서 60㎏의 백미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흔히 말하는 긴죠주(吟釀酒)이고, 50% 이상을 깎아내면 다이긴죠주(大吟釀酒)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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