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로이트 글로벌 경제 리뷰] 식량 인플레 빨간불…전쟁·수출 제한·기후변화 ‘공급 충격’ 우려
전 세계 가계 재정을 1년 넘게 옥죄었던 식량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올해 6월 들어 드디어 꺾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6월 세계식량가격지수가 2021년 4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 에너지 물가 상승률도 동반 하락하면서, 2022년부터 2023년 초까지 전 세계를 불안케 했던 식량 인플레이션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7월 들어 두 가지 ‘공급 충격’이 발생했다. 첫째,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을 파기했고, 둘째,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 정부가 쌀 수출 금지 조치에 나섰다. 두 가지 충격으로 인해 주식 원료 밀과 쌀 공급난과 인플레이션 공포가 확산됐다.
글로벌 식량 인플레, 작년 3월 정점 찍고 하락
주요 곡물 수출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에 휩싸이면서 지난해 글로벌 식량 가격이 급등했다. 에너지 가격이 뛰면서 운송비도 뛰었고,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해 비룟값도 급등했다. 게다가 쌀과 팜유 주요 수출국인 인도, 인도네시아가 가계경제 보호 목적으로 특정 상품의 수출을 금지했다. 기후변화로 농작물 작황이 변한 것도 공급 충격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 조류독감이 유행하면서 달걀과 가금육 가격이 뛰었다.
하지만 글로벌 식량 가격은 2022년 3월에 정점을 찍고 하락했다. 가장 큰 이유는 흑해곡물협정이 체결되면서 식량 위기 우려가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협정이 체결된 후 우크라이나의 흑해 주요 항만 3곳에서 식량과 비료 수출이 재개됐다. 또 덕분에 러시아도 제재를 피하며 식량과 비료를 수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 항만 3곳에서 3200만t의 식량이 수출됐다. FAO에 따르면, 2022년 5월~2023년 6월 글로벌 곡물 가격이 27.4% 하락했다.
에너지 가격이 2022년 중순 정점을 찍고 하락한 것도 식량 인플레이션 완화에 도움이 됐다. 지난 7월 세계은행(WB)의 천연가스가격지수는 2022년 8월에 기록한 정점에서 무려 81.3% 하락했다. 남미와 미국의 주요 곡물 생산량도 충분했다. 최근 수개월간 쇠고기와 양고기뿐 아니라 가금육 등 육류 가격도 하락했다.
지난 6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하위지수인 식품지수 상승률은 전년 대비 4.7%로, 지난해 8월에 기록한 고점인 13.5%에서 크게 둔화했다. 유럽 식량 인플레이션율은 여전히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전 수준이나 미국보다 높지만, 최근 수개월간 역시 하락하고 있다(그래프).
러 흑해곡물협정 파기·인도 쌀 수출 금지에 공급 충격
이렇듯 식량 인플레이션이 완화돼 전 세계 소비자가 한시름 놓던 중, 지난 7월 두 가지 공급 충격이 발생했다. 첫째, 러시아가 7월 17일 흑해곡물협정을 파기했다. 흑해곡물협정은 전쟁으로 흑해 항로가 막히자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을 보장하기 위해 2022년 7월 22일(이하 현지시각) 유엔과 튀르키예(옛 터키)가 중재해 체결된 협정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주요 항만과 수송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120일 기한으로 유지되며, 협정 당사자가 해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자동 갱신된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올해 5월부터 해지 협박을 해오다가, 튀르키예 중재로 7월 18일까지 겨우 연장됐던 협정을 결국 파기했다. 러시아가 협정을 파기한 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원자재지수(GSCI)의 소맥(밀)지수는 7월 12일~25일 16.3% 올랐다. FAO의 밀가격지수도 7월 들어 전월대비 1.6% 올라, 2022년 10월 이후 첫 월간 상승세를 기록했다.
두 번째 충격은 인도에서 발생했다. 인도 정부는 7월 20일 국내 쌀·밀 공급과 가격 안정을 위해 정부 허가 없이는 바스마티 품종 외의 백미 수출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인도가 글로벌 쌀 수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40%로, 세계 2~4위 쌀 수출국인 태국·베트남·파키스탄 수출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2022년 기준). 기후변화로 작황까지 악화된 상태에서, 인도의 쌀 수출 금지 조치로 국제시장에서 500만t이 넘는 쌀 물량이 사라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FAO의 쌀가격지수가 지난 7월에 전달 대비 2.8% 오르며, 근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저소득 국가, 더 큰 피해 노출
공급 충격이 지속되면 글로벌 식량 물가가 다시 치솟을 수 있다. 인도의 쌀 수출 금지는 국내 가격이 안정될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권자로서 목소리가 큰 저소득층 인구가 많은 인도에서 식량 가격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정부가 조치를 번복하기가 쉽지 않다. 2024년 봄 총선을 앞두고 있는 터라 인도 연방정부는 더더욱 국내 식량 물가를 글로벌 공급 우려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실정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전황이 갈수록 꼬이는 러시아가 협상장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양측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거나 흑해곡물협정에 그대로 복귀하거나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산 식량 수출이 흑해곡물협정 파기 이전으로 빠르게 회복되기는 힘들 것이다.
주요 식량 수입국, 특히 개발도상국은 공급 충격에 더욱 취약하다. 국제구조위원회(IRC)에 따르면, 흑해곡물협정이 파기되면서 전체 곡물 수입량 중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산이 80%를 차지하는 동아프리카의 식량난이 심각해질 전망이다. 2022년 기준 아프리카 국가들의 쌀 총수입량 중 인도산이 6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인도의 쌀 수출 금지도 아프리카 지역에 큰 충격이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주로 비(非)바스마티 백미를 수입하기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식량 안보뿐만이 아니다. 식량과 에너지 가격 상승은 구조적 결함과 통화가치 절하를 수반하기 때문에 정치·경제적 고통이 가중된다. 지난해 식량난이 정치 위기로 확산한 이집트와 스리랑카가 대표적 사례다. 결국 이집트는 국제기구에 손을 벌려야 했고, 스리랑카는 디폴트 사태에 직면했다.
부유한 국가들이라고 해서 피해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인도산 쌀의 주요 수입국이고, 중국은 우크라이나산 밀을 대량 수입한다. 선진국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저소득 국가에 비하면 일시적 식량 인플레이션은 잘 헤쳐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도 인플레이션이 장기화하면 저소득층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릴 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식량 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전쟁과 수출 금지 등 정치적 요인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전 세계적으로 농작물 작황의 예측이 어려워지고 있다. 홍수, 비계절성 폭우, 가뭄, 폭풍, 폭염 등 기상이변의 빈도와 정도가 높아질수록 식량 공급 충격은 더욱 자주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처럼 당장 해결해야 할 식량 위기가 발생하면, 그간 좀체 끌어내기 힘들었던 글로벌 기후 대응 협력이 강화될 수 있다. 21세기 인류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하는 상황은 지금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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