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이그 노벨 공중보건 부문상 수상] 변기를 사랑한 한국인 물리학자, ‘웃긴’ 노벨상 받았다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전문기자 2023. 10. 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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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 스탠퍼드대 의대의 박승민 박사가 대학 구내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앞에서 변기에 앉아있다. 그는 대소변 상태를 파악해 질병을 진단하는 스마트 변기를 개발한 공로로 올해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이그 노벨상의 마스코트가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것이어서 이런 모습을 연출했다. 사진 미 스탠퍼드대 2 이그 노벨상의 마스코트인 ‘냄새나는 사람(The Stinker)’.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을 패러디했다. 사진 이그 노벨상

변기에 푹 빠진 한국인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진짜 노벨상은 아니고 재미로 주는 가짜다. 과학자가 변기와 배설물을 진지하게 연구한 것이 우습다고 상을 받았지만, 대소변으로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감염병 감염까지 추적할 가능성을 인정받은 결과로도 해석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발간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연구 연보(Annals of Improbable Research)’는 9월 15일(현지시각) “스탠퍼드대 의대 비뇨기의학과 박승민 박사가 제33회 ‘이그 노벨상(Ig Nobel Prize)’ 공중보건 부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그 노벨상은 통상 노벨상 발표 한 달 전에 발표하는 ‘짝퉁 노벨상’이다. 이그는 ‘있을 법하지 않은 진짜(Improbable Genuine)’라는 뜻의 영어 문장에서 앞 글자를 땄다. 노벨상처럼 여러 과학 부문상과 문학상·경제학상·평화상이 있으며, 수학상과 환경보호상처럼 노벨상에는 없는 부문상도 수여한다.

대소변으로 질병 진단하고 코로나19도 추적

주최 측은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나서 새로운 생각을 할 기회를 제공한 연구에 이그 노벨상을 수여했다”라고 밝혔다. 단순히 웃고 넘기지 말고 의미를 곰곰이 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승민 박사는 2020년 ‘네이처 바이오메디컬 엔지니어링’에 진단용 스마트 변기를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스마트 변기 내장 카메라로 대소변 사진을 찍어 10여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변의 색이나 크기, 소변량과 시간 등으로 신체 상태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의사에게 대소변 상태를 말해도 같은 방식으로 진단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박 박사는 “혐오감 때문에 자신의 대소변 상태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며 “스마트 변기는 사용자 대신 대소변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해 진단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 변기는 사용자도 구분한다. 박 박사는 “처음엔 물 내리는 손잡이에 지문 인식 장치를 달았다가 나중에 사람마다 다른 항문 주름으로 개인을 식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박 박사는 서울송도병원에서 11명의 데이터를 받아 분석했는데, 개인 구별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스마트 변기로 무증상 감염자를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는 논문을 네이처 출판 그룹 학술지에 발표했다. 학교나 공항, 군대 공중화장실의 스마트 변기가 극미량의 대변을 채취하고 내장 진단 키트로 바이러스 유무를 판정하는 방식이다.

물리학자에서 의학 연구자로 변신

박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2008년 미국 코넬대에서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리학자지만 미세유체를 전공해 자연스럽게 의학 연구로 길을 잡았다. 의료 현장에는 임신 진단 키트나 코로나19 진단 키트처럼 미세유체를 이용한 기기가 많다. 타액이나 소변 같은 유체가 모세관 현상에 따라 섬유 재질에 스며들면서 위로 빨려간다. 그사이 감염이나 임신 여부를 알려주는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나고 색이 변한다.

박 박사는 이그 노벨상 수상 소감을 밝힌 영상에서 가장 먼저, 2020년 세상을 떠난 스탠퍼드대 의대 영상의학과의 산지브 샘 감비어(Sanjiv S. Gambhir)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박 박사는 2013년 감비어 교수 연구실에 방문 연구자로 왔다가 이듬해 강사로 자리 잡았다. 박 박사는 “감비어 교수는 평소 건강 상태를 점검해 질병을 예방하는 스마트 변기의 기본 개념을 알려준 분”이라고 했다.

감비어 교수는 평생 ‘정밀 건강(precision health)’을 주장한 과학자다. 정밀 의료가 질병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 치료하는 것이라면, 정밀 건강은 건강 상태를 정밀하게 파악해 병을 미리 예방하자는 것이다. 박 박사는 “감비어 교수는 비행기에 센서 수백 개를 달아 엔진 상태를 모니터하면서 고장을 예방하듯, 의료에도 그런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스마트 변기는 기술 측면에서 거의 완성된 상태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 박 박사는 “가장 큰 난관은 문화적 거부감과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라며 “사회 각계와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불안감을 해소시키겠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의 화장실 운동에 충고하기도

박 박사는 스탠퍼드대에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조각상 앞에서 수락 영상을 찍었다. 이그 노벨상의 마스코트가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냄새나는 사람(The Stinker)’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좌대에서 굴러떨어진 모습이다. 나중에는 스마트 변기에 앉아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자세도 취했다. 하반신 부분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웃음까지 안겨줬다.

그는 수상 수락 영상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립자인 빌 게이츠도 언급했다. 빌 게이츠는 저개발 국가에 화장실을 보급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배설물로 퍼지는 각종 감염병을 깨끗한 화장실로 예방하자는 것이다. 박 박사는 그런 빌 게이츠에게 “화장실은 위생을 넘어 건강관리로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깨끗한 화장실에서 한 걸음 나가 스마트 변기로 질병을 예방하자는 말이다.

이그 노벨상은 진짜 노벨상 수상자들이 수여한다. 박승민 박사는 2021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미국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아뎀 파타푸티언(Ardem Patapoutian) 박사에게 상을 받았다. 변기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나온 파타푸티언 박사는 이날 스마트 변기의 성과를 재치 있게 표현하기 위해 변기 청소용 뚫어뻥으로 트럼펫 음량을 조절하며 연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국인으로는 다섯 번째 이그 노벨상 수상

우리나라는 아직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지만, 이그 노벨상에서는 올해 박 박사까지 모두 다섯 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1999년 코오롱의 권혁호씨가 ‘향기 나는 정장’을 개발한 공로로 환경보호상을 받았으며, 미국 버지니아대의 한지원씨가 커피잔을 들고 다닐 때 커피를 쏟는 현상을 연구해 2017년 유체역학상을 수상했다.

종교인들도 수상했다. 2000년에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1960년 36쌍에서 시작해 1997년 3600만 쌍까지 합동 결혼시킨 공로로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또 1992년 10월 28일 오후 12시 세상의 종말인 휴거(携擧)가 온다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가 2011년 이그 노벨 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그 노벨상 측은 당시 “수학적 가설과 계산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세상에 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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