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150> ‘필드의 우영우’ 발달 장애 골퍼 이승민이 만든 기적] 도움받던 승민이가…1부 투어 자력 출전
“그동안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내용처럼 인턴 변호사에서 정규직 변호사가 된 것 같습니다. 남은 대회에서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둬 코리안투어 QT(퀄리파잉 테스트) 파이널 스테이지에 직행하고 싶습니다.”
발달 장애 프로골퍼 이승민(26·하나금융그룹)은 올 하반기 자력으로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 투어 무대에 서고 있다.
지금까지 초청 선수 자격으로 KPGA 코리안 투어에 나서던 이승민이 상반기 성적으로 하반기 출전 자격을 조정하는 리랭킹 제도를 통해 자력으로 출전권을 확보한 것.
지난 2017년 KPGA 투어 프로 자격을 획득한 이승민은 지금까지 초청 자격으로 31개 코리안 투어 대회에 출전해 4차례 컷을 통과했다. 4라운드 대회는 대부분 1·2라운드 성적(컷)을 기준으로 3라운드 진출자를 가린다. 1부 투어 대회에서 컷을 통과한다는 건 대회에 나온 정상급 선수 약 150명 가운데 60~70등에 든다는 이야기다.
발달 장애 선수에겐 우승 못지않은 성과다.
이승민은 2018년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에서 처음 컷을 통과했고 2022년 SK텔레콤 오픈, 2023년 골프존 오픈 in 제주, KB금융 리브챔피언십 등 점차 컷 통과 수를 늘리고 있다. 올해 KB금융 리브챔피언십에서 거둔 37위가 개인 역대 최고 순위다.
자력으로 코리안 투어 출전 기회 얻어
이승민은 올해 상반기 초청으로 출전한 대회 성적으로 리랭킹 순위 39위를 기록, 자력으로 하반기 코리안 투어 출전 기회를 얻어냈다. 이승민은 9월 14일 개막한 비즈플레이 전자신문 오픈과 21일 개막한 iMBank 오픈에 잇따라 출전했다.
이승민은 두 살 무렵 선천적 자폐성 발달 장애 진단을 받았다.
특이하게 어려서부터 파란 잔디에 하얀 공이 날아다니는 골프를 좋아했다. 잔디를 한 움큼 쥐고 냄새 맡는 버릇이 있어 늘 코에 흙이 묻었다. 냄새만 맡아도 잔디 종류를 알아맞혔다. 그가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10년간 미국 등에서 생활하다 귀국하니 장애인의 현실은 숨 막혔다. 아버지를 따라 골프장에 간 날 이승민은 “나 이거 하고 싶어”라고 했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 박지애씨가 아들의 골프 뒷바라지를 결심했다. 이승민은 5~6세 유치원생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걸 두려워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과 ‘레인맨’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전형적인 자폐증 증상이 있었다.
“골프 하면서 언어 구사 능력 몰라보게 좋아져”
좋아하는 골프를 하면서 이승민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표정도 좋아졌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중·고교 때 대회를 나가면 “진행 속도가 느린데 다른 애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언제까지 골프를 시킬 거냐”는 뒷말이 쏟아졌다. 박씨는 “골프가 아니면 승민이는 골방 바깥으로 나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살아서 숨 쉬는 동안 온몸으로 막아서 승민이가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임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골프는 기적을 선물했다. 고교 2학년이던 2014년 이승민은 세미 프로골퍼 자격증을 땄고 3년 뒤에는 한국프로골프(KPGA) 사상 처음으로 발달 장애를 가진 선수가 1부 투어 프로 선발전을 통과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어머니 박씨는 아들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함께 있다. 아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아들보다 늦게 잠든다. 아들이 대회에 나갈 때마다 클럽하우스에서 5~6시간씩 대기한다. 박씨는 “우리가 생각지 않게 불편하게 했을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먼저 한다”고 했다. 주치의인 분당서울대병원 유희정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이승민군은 골프를 하면서 발달 장애 2급에서 좀 더 완화된 3급이 됐고 언어 구사 능력도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했다.
이승민은 지난해 미국골프협회(USGA)가 창설한 US 어댑티브(장애인) 오픈에서 초대 챔피언에 오르며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됐다.
세계 각국에서 온 장애인 골퍼 96명(남자 78명, 여자 18명)이 참가한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한 이승민이 초대 챔피언으로 등극하며 향후 5년 동안 대회 출전권을 보장 받았다.
이승민은 시상식에서 준비해 간 감사의 글을 읽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그는 영어를 할 줄 안다. “저를 어둠 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꺼내 주신 부모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전달합니다. 후원사인 하나금융그룹과 캘러웨이, 보그너에도 감사합니다. 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윤슬기 캐디 겸 트레이너에게도 고맙습니다. 목표인 PGA투어와 마스터스까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겠습니다.”
US 어댑티브 오픈은 미국골프협회(US GA)가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지난해 마련한 대회다. 팔다리가 성치 않은 소녀부터 시각장애인 할아버지까지 발달 장애와 다리 장애 등 다양한 장애를 지닌 각국 100명 안팎의 골퍼가 참가한다. 이 대회는 프로와 아마추어 구분 없이 일정 핸디캡(타수) 이상의 자격을 갖추면 된다. 장애 등급에 따라 티잉 구역을 5개(3862~6460야드)로 달리해 3라운드 경기를 한다. 장애 부문별 우승자와 통합 남녀 우승자를 가린다.
이승민은 올해 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제2의 이승민 찾아라”
발달 장애 골퍼 이승민이 기적의 발걸음을 딛는 데는 따뜻한 후원이 큰 힘이 됐다.
하나금융그룹(회장 함영주)은 이승민이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준회원이었던 2016년부터 8년째 후원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은 “이승민 선수의 후원을 시작할 때 어린 소년 같았던 선수가 낯선 환경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US 어댑티브 오픈 챔피언이 되고 국내 프로 무대에서도 활약하는 등 감동을 주고 있다”며 “이승민 선수가 앞으로도 최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SK텔레콤은 지난해부터 제2의 이승민을 찾아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SK텔레콤 어댑티브 오픈’을 개최해 올해 2회 대회까지 성공적으로 열었다. 올해 발달 장애 골퍼 24명이 출전해 한 조에 두 명씩 유명 프로골퍼 한 명과 함께 조를 이뤄 경기했다. 이승민은 출전 선수가 아닌 발달 장애 선수들을 돕는 프로골퍼로 나섰다. 올해 우승자는 이승민과 함께 내년 제3회 US 어댑티브 오픈에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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