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75> 프리드리히 쿨라우] 19세기 초·중반 덴마크 문화의 황금기를 연 작곡가
8월 중순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동안, 뉴스에서는 남유럽을 비롯해 저 멀리 한국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각종 우려스러운 재해 소식이 종종 들려왔다. 또 다른 기후변화의 영향일까. 이곳 북독일은 7월부터 거의 섭씨 영상 15도를 오르내리는 가을 같은 날씨였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그래도 에어컨 안 켜는 날씨가 얼마나 좋으냐고 반문한다만, 7월부터 체류하는 내내 추위와 더불어 맑은 하늘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비 오고 우중충한 날씨가 속상하기만 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외투와 우산을 챙겨서 시내 골목 곳곳을 산책해 본다. 매일 걷는 거리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장소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여행 온 것처럼 도시는 내게 종종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함부르크 시내 오페라하우스 근처 작은 골목을 지날 때였다. 무심코 눈길이 닿은 한 건물 모퉁이에 작은 명판이 보였다. 너무도 초라하고 관리가 안 돼 녹이 슨 동판은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의 색과 너무도 비슷했다. 이 거리를 숱하게 다니면서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평소 거리 곳곳에 있는 설치물을 그리 관심 있게 관찰하는 성격도 아니지만, 이날은 왠지 이 동판이 내 눈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읽어봤더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프리드리히 다니엘 루돌프 쿨라우, 1802년부터 1810년까지 함부르크시에 머물다.”
이후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쿨라우, 쿨라우?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1800년대를 살다 간 이를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입으로 되풀이하며 말하는 동안 저 깊은 기억 속에 잠자던 음악과 기쁨이 살짝 느껴지는 듯했다. 맞다. 그는, 내게 어렸을 적 아름다운 소나티네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작곡가 쿨라우였다.
필자는 네 살 때 처음 피아노를 접했다. 당시 집 맞은편에서 어머니 친구가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에 우연히 놀러 간 그 순간부터 피아노를 업으로 삼고 현재의 순간까지 피아노는 늘 필자의 삶과 함께한 친구이자 분신 같은 존재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만둘 뻔했던 우여곡절도 꽤 많았다. 그중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던 그 유명한 ‘바이엘(바이어)’ 교재 ‘상’권이 끝나고 ‘하’권으로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페르디난트 바이어(Ferdinand Beyer)는 지금은 훌륭한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가로 인식되고 있다. 바이엘은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는 초보들의 손가락 움직임과 기초적인 표현을 목표로 잘 설계된 교본이다. 하지만 솔직히 당시 어린 마음에는 너무도 지루했었다. 그렇기에 당시 필자에게 바이엘은 ‘하농(Charles Louis Hanon)’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습 시간에 시곗바늘의 초침 속도를 늘여주기는커녕 과거로 돌려놓는 듯한 느낌도 들게 했다. 선생님이 악보 위에 사과를 10개 그려주면, 반복할 때마다 색칠해 놓은 것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지워놓은 듯한 원망 섞인 감정도 들었다.
“엄마, 나 피아노 학원 그만 다니고 싶어”라고 말하고 학원으로 향하는 날, 선생님은 “이제 너도 어느 정도 기초를 닦았으니 이 곡을 한번 쳐보렴”라고 말하며 ‘소나티네 곡 집’을 한 권 줬다. 그날 학원에서 선생님과 소나티네 작품 악보를 보는 동안 정말 몸에 전율을 느꼈던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지루하지 않고 좋은 곡이 있다니!’ ‘이게 바로 내가 라디오에서 듣던 피아노 음악 같은 느낌인데 말이지!’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작곡가는 바로 방금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한 녹슨 동판에 적혀 있던 프리드리히 쿨라우였다.
그의 소나티네는 상냥하며 듣기 좋은 음악적 내용에 더해 기술적으로 그리 난해하지 않아 초보자가 입문하기에 아주 좋은 작품이다. 작곡가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피아노 학원 근처에 지나가 봤다면 한번쯤은 꼭 귓가에 스쳐 들어봤을 음악이다.
프리드리히 쿨라우는 1786년 당시 하노버 왕국의 윌첸(Uelzen·현재 독일 니더작센주에 위치)에서 태어나 1832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삶을 마친 음악가다. 1802년에는 함부르크로 넘어가 피아노를 공부하고 1804년에 공식적인 데뷔 연주 후 활발히 연주 활동을 했다. 1810년에 함부르크로 들이닥친 나폴레옹 군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떠나 그곳에서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는 1821년부터 1825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 빈(현재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베토벤과 친교를 맺으며 음악적으로 대단히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품에는 베토벤의 영향을 포함한 음악적인 성숙함과 연륜이 더해지며 훗날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작곡한 징슈필(민속 음악극) ‘요정의 언덕(Elverhøj)’은 덴마크 왕국 음악사에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자 19세기 초·중반 덴마크의 문화 황금기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배우는 초보자에게 소나티네 작품으로 친숙하겠지만, 피아노와 여러 다른 악기 (특히 플루트) 그리고 실내악, 오케스트라 또 오페라도 작곡한 다재다능한 작곡가였다. 작품이 수백 편에 달한다. 또한 그가 태어난 도시 독일 윌첸에서는 주기적으로 그의 음악을 기념하기 위해 ‘쿨라우 국제 플루트 콩쿠르’도 개최하고 있다.
내 발걸음은 어느덧 연습실 스튜디오 문 앞에 닿아간다. 오랜만에 마음에 떠올린 어렸을 적 추억과 쿨라우의 작품을 건반으로 눌러볼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만 한다.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프리드리히 쿨라우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작품번호 20번
피아노 예뇌 얀도(Jenő Jandó)쿨라우의 소나티네 작품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편안하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빈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식을 띠고 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발전으로 피아노 악기의 개량과 더불어 생산량도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19세기에 사회를 주도하는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의 소비로 이어지며 18세기에 궁정이 중심이 되던 음악 무대가 각 가정으로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각 가정의 살롱에서 작은 규모로 음악회가 많이 열렸으며, 전문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즐겁게 연주할 수 있는 쉬운 작품들도 많이 창작됐다. 쿨라우의 소나티네도 한 예로서, 예술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훌륭하지만, 기술적으로 난해하지 않은 탓에 예나 지금이나 많은 가정에서 초심자의 마음과 귀를 여전히 즐겁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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