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2>] 매년 다른 물질로 태어나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일 것 같다

박혜진 2023. 10. 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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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신경의학자이자 아름답고 생생한 글로 누구보다 많은 독자를 거느렸던 작가 올리버 색스는 일평생 원소 애호가였다. 원소를 향한 애정이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그에게 원소와 생일이 늘 하나로 얽혀 있을 정도였다. 열한 살 때 색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나트륨이야.” 나트륨이 11번 원소이기 때문이다. 일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금이다.” 금은 79번 원소다. 여든 번째 생일을 목전에 두고 그는 80번 원소 수은에 관한 꿈을 꾼다. 수은이 되기 전, 그러니까 여든 살이 되기 직전에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든 살이 되는 것이 기대된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올리버 색스가 원소를 사랑했던 이유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매주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과학 잡지가 도착하기를 열렬히 기다렸던 그가 일찍이 생물학이나 의학이 아니라 물리학에 매혹됐다는 사실, 꼬마일 때부터 상실의 슬픔에 대처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을 익혔다는 고백은 원소를 향한 그의 사랑에 일말의 단서를 제공한다. 처음엔 숫자, 그다음엔 원소들과 주기율표를 친구 삼았던 그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곧장 물리의 세계로 ‘귀향’하는 외톨이족이었던 것이다. 그는 ‘생명이 없지만 죽음도 없는 세계’에서 평화와 안정을 느꼈던 것 같다.

삶이 주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찾아낸 상상 속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원소를 향한 그의 사랑이 그가 삶을 사랑하기 위해 절박하게 찾아낸 발명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삶이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단일한 연속체처럼 보일지라도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각각 독립된 상태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을 자유롭게 경험하는 동시에 모든 시절의 자신에게 긍지를 느낄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매년 다른 물질로 태어나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일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무리도 아닌 것이, 인간도 결국은 여러 물질의 총합이고, 매년 물질의 상태에는 변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생명도 없고 죽음도 없는 세계에서 생명도 있고 죽음도 있는 세계로. 외톨이족이 아닌 공동체의 세계로. 그가 꿈까지 꾸며 기대했던 여든 살, 그러니까 수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여든 살에 그는 자신의 간 절반이 전이암에 잡아먹혔음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는 죽음 앞에서 몇 편의 글을 쓰는데, 그 2년 동안 쓴 짧은 에세이 4편을 모은 책이 바로 ‘고맙습니다’다. ‘수은’ ‘나의 생애’ ‘나의 주기율표’ ‘안식일’이라는 글은 각각 삶과 죽음에 대한 솔직한 성찰을 보여 준다.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쓴 글인 ‘안식일’의 마무리는 ‘내면의 평화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으로 채워져 있다. 그 글은 살아 있는 내게 너무나도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생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평화란 무엇일까. 그건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런 평화에 도달할 순간을 위해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 책을 처음 읽었던 2016년 이래 최근까지도 이렇다 할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오늘 아침,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절망 끝에는 항상 새로운 희망이 기다리고 있는 법. 슬픈 소식 앞에서 칼 세이건의 ‘에필로그’와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를 함께 떠올렸다. ‘에필로그’는 우주와 과학에 대한 에세이지만, 책의 말미에 이르면 세이건 자신의 투병에 대한 경험으로 가득한 일종의 투병기 성격도 있다. 세이건은 거듭해서 아픈 자신을 돌봐준 가족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 고마워한다.

세이건이 삶의 마지막 구간을 보내며 ‘고마워’했던 마음과 올리버 색스가 삶의 마지막 구간을 보내며 ‘고마워’했던 마음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색스는 ‘안식일’이라는 마지막 글에서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친척 집을 자신의 동성 파트너와 함께 방문한 일화를 꽤 자세히 쓴다. 그곳에서 예상 밖의 환대를 받았던 경험이 그에게 지극한 평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원소를 친구 삼는 것이 외톨이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면 타인들과 관계, 즉 공동체 속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건 죽음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까. 어쩐지 나는 그러한 사랑, 고마움으로 번역될 만한 안온한 사랑이야말로 올리버 색스가 말하는 궁극의 평화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생명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에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상처를 최소화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있을 때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최후의 평화란 그러한 상처투성이 사랑에마저 고마워하고 있을 때, 바로 그런 순간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은 가장 잔인한 배움이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하루였다.

Plus Point
올리버 색스

사진 올리버 색스 재단

신경의학, 뇌과학 분야 전문 교수였다. 1970년대부터 신경학 관련 에세이를 쓰며 저명한 대중작가로 거듭났다. 대표작으로 ‘뮤지코필리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등이 있고 자서전으로 ‘온 더 무브’가 있다. 문학적인 글쓰기로 대중과 소통하며 ‘의학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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