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노무현 정부 ‘잃어버린 10년’?…보수정부보다 성장률 높아
“노 대통령, 단기 지표개선에 거리 둬
장기적 성장잠재력 제고 등에 주안점”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은 과거에 비해 저성장이었다. 또한 두 정부가 과거보다 획기적으로 복지제도를 발전시키고 복지예산을 늘렸지만 양극화 추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성장과 양극화는 보수집단이 해방 뒤 최초 민주개혁정부 10년의 실적을 깎아내리게 만들었다.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지만, 이 시기 저성장과 양극화는 두 정권의 정책 실패 때문이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가 가져온 경기침체와 구조조정, 대량실업, 노동시장 구조 변화 때문이었다. 두 진보정권은 하필 어려운 시기 집권해 나름 선방한 것이다. 그 뒤에 온 보수정부 10년은 내세울 성과가 도무지 없고 두 대통령이 나란히 감옥에 가는 참담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한때 유행하던 ‘잃어버린 10년’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DJ·노무현 시절 성장률 4~5%대…MB·박근혜 땐 3% 수준 머물러
김대중 정부 평균 성장률은 5.2%, 참여정부는 4.3%였다. 장기간 고성장에 익숙해 있는 우리 국민은 4~5% 성장에 못 견뎌 했다. 경기가 나쁘다고, 장사가 안된다고 온통 정부 탓을 했다. 2004년 11월 전국 식당주인 3만명이 서울 여의도에 모여 솥단지를 집어 던지는 시위를 벌였다. 보수야당과 언론은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조롱했고, 심지어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경제가 죽었다며 ‘환생경제’ 풍자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럼 보수정당은 경제를 잘 운용했을까? 천만의 말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성장률은 각각 2.9%, 3.0%에 불과했고 현재 윤석열 정부는 1.5%다. 대구에 있는 나의 단골 빵집 주인은 참여정부 내내 나만 보면 “노무현 때문에 장사 안된다”고 불평했다. 그 뒤 이명박 정부 때 “장사 잘돼요?”라고 묻자 “요새는 더 안돼요”라고 해서 같이 웃었다.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가 섣불리 추진한 세계화, 개방정책이 빚은 참사였다. 1998년 경제성장률이 –8%로 급락하고, 3% 수준이던 실업률이 8%까지 오르니 저성장, 양극화는 불가피했다. 금 모으기 등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한국은 이른 시일 내에 국제통화기금(IMF) 빚을 갚고 위기종식을 선언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장기적 구조개혁보다 단기적 경기 부양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큰 병에 걸렸다면 환부를 도려내고 근본 치료를 한 뒤 퇴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조기 퇴원했다는 얘기다. 국민의정부 경제정책은 진념, 전윤철, 이헌재, 강봉균, 이기호 등 경제관료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이 추진한 각종 경기부양책은 일시적으로 경제지표를 호전시켰지만 장기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길거리 카드 발급으로 인한 카드대란(20화 카드대란 참조), 과도한 벤처 육성책으로 인한 소위 벤처 게이트, 부동산 규제 전면 해제로 인한 부동산 투기 재연 등 문제가 많았다.
‘외환위기’ 내세워 과도한 규제해제…벤처 게이트·땅 투기 등 부작용
카드대란은 20화에서 다루었으니 벤처와 부동산을 보자.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지식기반 경제’와 ‘정보대국’을 강조하면서 테헤란밸리에 벤처 붐이 불었다. 정부의 벤처 육성책이 과도한 나머지 ‘묻지마 벤처투자’가 일어났다. 당시 누구든 벤처기업을 한다고만 하면 3억원씩 지원해주던 벤처 육성자금은 공짜돈으로 인식돼 ‘요즘 벤처 안 하면 바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벤처기업 숫자는 1998년 2천여개에서 2001년 봄 1만1천개를 돌파했다. 그러나 권력 실세와 벤처 기업인 사이 유착으로 이른바 벤처 게이트가 터지면서 벤처 거품은 2001년 이후 급속히 꺼졌다.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나 영국의 남해회사 거품 사건처럼 한국의 벤처투자는 비정상적 과열 양상을 보이다가 갑자기 거품이 꺼지고 말았다.
이 시기 국민의정부가 채택한 또 하나의 경기부양 정책수단이 역대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했던 부동산 경기부양이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하에 김대중 정부는 토지거래허가 구역 해제, 아파트 재당첨 금지 기간 단축 및 폐지, 토지공개념 제도 폐지, 분양가 자율화, 토지거래신고제 폐지, 분양권 전매제한 폐지, 무주택세대주 우선 분양 폐지, 신축 주택 구입시 양도세 면제, 취·등록세 감면 등, 풀 수 있는 것은 다 풀고 쓸 수 있는 부양책은 다 썼다. 특히 토지공개념 제도를 폐지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전강수 교수)
2003년 초 인수위 경제2분과의 부동산정책 보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라고 물었다.(이춘희 전 건교부 차관의 회고) 부동산 규제 중 풀 수 있는 건 다 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오래 잠자던 부동산 투기 광풍이 다시 불었다. 2002년 한해 전국 땅값이 8.9% 상승했다. 참여정부의 정책 실패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몇년 전 과도한 규제완화가 원인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니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에 바른 정책을 세우자는 뜻이다. 눈앞의 경제지표를 개선하려고 부작용이 나타날 정책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2003년 3월4일(화) 9시 국무회의(세종실)에서 노 대통령이 말했다. “경제정책 방향의 조기 확정은 불가능하고 적어도 1~2개월 소요된다. 기획예산처에서 내년 예산 기조를 정해 가을 정기국회에 올리는데 재경부와 청와대 정책실이 준비해서 국무회의에 올려 토론한 뒤 정하자. 그리고 5~10년 앞을 내다보는 중장기 경제운용 방향도 토론할 필요가 있다. 김영삼 정부 때 이동통신(CDMA 방식 도입), 김대중 정부 때 아이티(IT)처럼 큰 그림을 제시해야 하는데 가을까지 구체적 안을 만들자. 단기적 경기부양은 하지 않겠다.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4월29일(화) 오후 6시 관저에서 경기점검 만찬 회의가 열렸다. 박병원 재경부 차관이 발제하면서 한국개발연구원과 한국은행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이 대략 3%대로 일치한다고 보고했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경기가 2001년 6월에 바닥을 찍었는데도 그해 7월 경기부양책으로 추경을 두차례 해 7조원을 투입해 통화량을 늘리고 각종 세제 지원으로 소비와 정부지출을 증대시켰는데 이는 경기가 바닥을 치고 상승을 시작하는 국면에 전혀 타이밍이 맞지 않은 정책이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은 중산층, 서민, 서비스업 자영업자의 형편이 가장 어려우므로 이들을 위한 감세 정책이 필요하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에스케이(SK)글로벌 분식회계, 조흥은행 매각, 투신사와 상호저축은행, 카드대란 등 금융시장의 불안요소를 설명했다. 이어 청년실업, 가계대출 연체자 문제를 지적했다. 이들에게 아이티 교육과 인턴제 기회를 제공하고 부도난 영세기업에 대한 신용보증 등이 필요한데 한나라당이 내년 총선용이라고 의심해 반대한다는 얘기였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라면 모를까 이런 사업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데도 한나라당이 반대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지시했다. “경제부총리가 중심이 되어 대책을 마련하되 경기부양보다는 서민생활 대책으로 가야 하고, 성장잠재력을 높여 중소기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김진표 부총리가 경기대책으로 청년실업, 아이티, 신용보증 문제 등에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동의했고, 박병원 차관은 “금리를 인하하면 교과서적으로는 투자가 증가해야 하지만 실제 그 효과는 적고, 그 대신 부동산 가격을 자극할 우려가 커서 정책 사용에 한계가 있다. 서민생활 개선 위주로 정책을 마련해보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단기 지표 개선보다 장기적 성장잠재력 제고와 서민, 중소기업 살리기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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