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정의할 힘을 가질 때”···‘문화/과학’ 특집 ‘장애와 역량’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미국 사회학자 존 맥나이트 말이다. ‘문화/과학’은 ‘115호(가을호)를 내며’에 이 말을 머리에 올렸다. 이 말은 2017년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슬로건이었다. 김도현(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의 <장애학의 도전> 본문 맨 앞에도 실렸다.
진태원(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은 <역량으로서의 장애, 관계로서의 돌봄>에서 이 말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말과 연결한다. 랑시에르는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설립에 의해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정치가 존재한다”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했다.
진태원은 이어 “새롭고 진정한 보편성”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누군가에 의해 문젯거리로 여겨졌던 이들, 다른 이들과 평등한 이들로 간주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고,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이, 이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나 또는 우리는 비정상이지도 열등하지도 않으며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설 때 진정한 보편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은 본질상 적대를 함축합니다. 기존 보편성의 허구성과 지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상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적대적 행위가 보편성의 한 가지 척도를 이룹니다.”
특집 ‘장애와 역량’은 ‘정의하려는 힘’과 ‘혁명의 조건 또는 가능성’에 관한 글들이다. 권범철(‘문화/과학’ 편집위원)은 <장애는 어떻게 공통화의 역량이 되는가>’에서 “장애인은 비생산적인 존재”라는 통념을 뒤집는다.
권범철은 “오늘날 인간을 위계적으로 가르는 중요한 잣대”인 ‘생산적인 신체’와 ‘비용을 유발하는 나쁜 신체’라는 기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a. ‘생산적인’일을 하며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 b. ‘생산적인’일을 할 수 있지만 집에서 ‘노는’ 사람, c. ‘생산적인’일을 할 수 없고, 그래서 ‘비용’으로만 존재하는 사람.
권범철은 전통적으로 임금노동자 같은 a유형 노동자(임금노동자)만이 진정한 노동자로 여겨졌고, 어린아이, 노년층, 환자, 장애인 등 c유형의 사람은 기생하는 존재로 여겨졌다고 지적한다. ‘비용’과 ‘부담’ 즉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은 완전하지 못한, 결함 있는 존재로 이해”되면서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권범철은 “그런데 왜 우리가 ‘생산적’이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경제 성장이 삶의 풍요로움을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는 취지의 반문이다. 장애인은 “억지로 일하는 자신의 ‘생산적인’ 삶을 긍정하기 위한 구성적 외부”로 존재한다. 즉 자신이 ‘생산적인’ 존재라는 걸 긍정하려고 장애인을 ‘비생산적’ 존재로 호명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인간’은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이기도 하다.
권범철은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으로 이해되는 한, 우리는 생산적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에서 배제된 이들을 ‘비생산적’이고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을 가진 존재로, 즉 노동 거부의 역량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장애인과 활동보조사를 한 예로 든다. “활동보조사는 돌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장애인은 그 과정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즉 장애인은 ‘특별한’ 필요를 생산한다.” 돌봄의 관계에서 이들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박김영희의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살려는 게 장애인운동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인용하며 “여성운동이 남성처럼 살려고 하는 게 아니듯, 장애인운동 역시 비장애인처럼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 운동들은 “다른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는 일과 마주”한다.
정창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는 <비-문명의 역습: 장애인들의 비상행동과 ‘장소성’의 재-구축>에서 올해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 의미를 ‘예외상태’와 연결해 분석한다. 장애인이 탈 수 없는 계단형 버스를 멈춰 세우는 불복종 행동도 분석 대상이다.
불복종 행동 때 “비장애인만 탑승하는 시민권 열차에 우리도 탑승하게 해주십시오!”라는 장애인의 호소는 현 문명 체계를 뜻하는 ‘시민권 열차’가 “장애인들을 언제나 ‘무정차’하고 지나쳐왔음을, 즉 장애인들의 상례화된 예외상태 위에서 질주해온 것이었음을 폭로”한다. 정창조는 “이 문명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시민들이 정상질서 안에서 당연하게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1년에 외출한 날짜가 며칠인지를 세어가며 계속 방구석과 시설에 격리되어 있을 것”이고, “시민들이 삶의 당연한 수순처럼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동안 우리는 계속 ‘기생적 소비계층’이라는 낙인과 함께, 타인들의 멸시와 동정에 평생을 휘말려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장애인 올해 투쟁은 “이 문명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지나쳐온 것들을 문제로 재규정하고,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문명에 내포된 야만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정창조는 ‘타인의 권리 침해 위에서의 권리 요구는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는 ‘비난’ 속에는 “당신들이 누리는 문명인의 권리마저 이미 누군가의 권리 침해 위에서 가능한 것임이 단숨에 은폐”된다고 말한다. “즉 당신들이 자유롭게(?) 누리는 ‘출근할 권리’에는 이미 당신들이 감각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누군가의 피가, 당신들이 평소 그 존재를 결코 상정하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권리의 탈취 메커니즘”이 스며들었다.
이준석은 ‘비문명적 행동’(이준석), 오세훈은 ‘중대 범죄’(오세훈) 같은 표현을 쓰며 비난했다. 경찰들과 서울교통공사 노동자들마저 강제 진압에 나선다. “이 편협한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한 지하철행동 비판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전도 속에서 그간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타자들 사이에 비로소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기껏해야 쓸모없고 무능력하여, 일방적인 돌봄의 대상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났던 존재들이 이 전도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우리는 당신들에게 보이지 않던 사람, 동정을 받아 겨우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찮은’ 몸뚱아리의 몸짓 몇 개만으로 순식간에 당신들의 일상을 정지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고 했다. 정창조는 장애인들의 출현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본다.
‘합법적 저항’은 효과가 있을까? 전장연은 “오랜 기간 이 ‘모범 시민’들이 제안하는 대안적 방식을 모두 병행”했다. 정창조는 “그러한 실천을 했을 때 우리의 존재는, 그리고 우리의 상례화된 비상사태는 당신들에게 정말로 감각되긴 했는가”라고 되묻는다.
출근길 지하철은 “노동력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다. 정창조는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누구인지 자격을 판별하는 데 그 어떤 장소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문명의 야만적 진실을 폭로하는 데, 낯선 존재의 출현을 통해 이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규범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는 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공간이 있을까”라고 말한다.
이해수(고려대 미디어학교육연구단 연구교수)는 <취약한 몸들의 ‘이야기판’과 돌봄 연대: 장애 브이로그가 매개하는 작은 정치‘들’>을 발표했다. “장애인의 미시 삶을 보여주는 브이로그가 유튜브에 축적되면서 장애인들 간의 예기치 못한 연결들이 생성”된 점에 주목한다.
즉 “‘비장애인들만 가득한 세상에서’(구르님) 박탈감을 느끼며 ‘나만이 장애인이라고 느꼈던’(한솔) 이들이 어디엔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감각, 즉 미지의 동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공통감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키오스크(무인 정보 단말기)가 그간 매장 주문이 힘들었던 청각 장애인에게는 유용한 수단이고, 시각 장애인에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보여주는 기계란 점도 확인한다. “이 차이에 대한 자각은 ‘너는 나와 다르다’의 발견으로 그치지 않는다. ‘다른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연대감을 일깨운다.”
시각, 청각, 지체 장애인들이 인터넷 방송의 ‘합방’ 등을 통해 “서로의 몸들을 연결”하는 ‘협업’과 ‘함께 돌봄’ 의미도 조명한다. 예를 들어 방송에선 뇌병변장애인인 그루님이 시각장애인 ‘우령’의 길 안내를 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연결된 몸들의 잠재력을 통해 그리고 소통과 마주침을 통해 삶의 역량을 확대”하고, “고립된 채 개인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함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돌봐줄 수 있는 존엄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다.
‘문화/과학’은 지난 6일 서울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특집 ‘장애와 역량’의 필진과 내부 편집위원들, 외부 섭외 토론자들이 참여하는 토론회도 열었다. 권범철, 정창조, 이해수와 편집위원 박자영, 천주희가 참가했다. 이번 특집 객원 책임편집위원을 맡은 김도현도 나왔다. 이승원(서울대 아시아센터 연구원)도 토론자로 참석했다. 박미애, 이현정이 수어 통역을 진행했다.
12번째 ‘쓰고 읽고 말하고 모이다’(쓰읽말모) 행사다. ‘문화/과학’ 공동 편집인 이광석은 “‘문화/과학’은 비판 이론적 담론을 생산하고 주도하는 저널이자, 사회와 문화 현장에 개입하고 이론적 실천을 지향해왔다. ‘쓰읽말모’ 행사는, 특집호 필자들 글을 좀 더 밀도 있게 논의하려 구독 회원과 일반 독자와 함께 하는 상호 소통의 자리”라고 했다. 그는 ‘쓰읽말모가 “예술, 문화, 노동, 지역, 생태, 과학기술, 여성, 장애, 교육 등 기간에 특집호에서 다뤘던 주제 영역에 맞춰 관련 사회 현실에의 개입과 시민사회 주체와의 상호 교류와 연대를 모색하려는 학문 실천적 취지를 지닌다. 비판적 연구자들이 그들 나름의 이론적 무기를 통해 사회 실천으로의 연결을 모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라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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