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하는 섬세한 방법을 일러주는 ‘어른의 말글 감각’[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기자 2023. 10. 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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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intro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구극(究極)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김무곤 교수 ‘종이책 읽기를 권함’ 중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나는 늘 자신의 쓸모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2011년 겨울.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 어떠한 용도도 없는 가장 순수한 읽기라니! ‘별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읽는 행위’ 위에는 시간이 나이테처럼 축적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쓴다. ‘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그 열한 번째는 김경집 교수의 ‘어른의 말글 감각’(김영사)이다.

어른의 말글 감각 표지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 대전에 내려갔다.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본가로 향하는데, 택시 문 안쪽에 ‘Daejeon is You’라는 스티커가 보였다. ‘대전은 당신이다’ 또는 ‘당신이 곧 대전이다’ 정도의 뜻이겠지만, 단순한 영어표현이 조금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때 남편이 “여기가 어뎌? 이~~ 대전이쥬!”라며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아하!’ 그래서 브랜드 슬로건이 ‘Daejeon is You’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읽을 때는 ‘대전 이즈 유’지만 빠르게 읽으면 ‘대전이쥬’가 된다. 말의 묘미까지 생각해서 만든 걸까 싶어 한참을 웃었다.

같은 말도 다르게 발음되거나 다른 뜻이 되기도 하는 것이 입말의 매력이다. 때론 그 말을 쓰는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제주말 중 ‘요망지다’는 “요사스럽고 망령되다”라는 뜻의 ‘요망하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제주에서는 “똑똑하고 야무지다”라는 의미를 ‘요망지다’라고 한다.

제주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재미가 쏠쏠하다. ‘아꼽다’는 ‘아니꼽다’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럽다”라는 뜻이다. 제주말에는 아직도 ‘·(아래 아)’ 발음이 남아 있어서 ‘딸’을 ‘똘’이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아깝다’를 ‘아꼽다’로 발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 섭섭하거나 서운한 느낌을 ‘아깝다’고 하고, 물건이나 사람을 보살피고 위하는 마음을 ‘아낀다’고 한다. 혹시 ‘아꼽다’라는 말에는 ‘아깝다’와 ‘아끼다’라는 뜻이 숨어 있지 않을까?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제주가 고향인 선배에게 이 말을 들려주며 그런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제주 사람인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고 했다. ‘아꼽다’는 말은 아까워서 아끼는 그런 심정과 비슷하다고 했다. 제주사람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숨은 뜻을 발견하다니 내심 뿌듯했다.

“글을 통해 얻는 가장 중요한 매력이 ‘섬세한 사유’라는 건 흔치 않은, 예상 밖의 생각이다. 말과 상(像)을 통해 얻는 직관적인(instinctive: 감각기관을 통해 즉각적으로 감각한다는 의미)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폭넓다. 이는 낱말을 ‘만지는’ 일에서 비롯된다. 글의 가장 큰 매력이자 글의 힘을 기를 수 있는 방식이 바로 ‘낱말 만지기’인 것이다.”

인문학자 김경집 교수가 지은 ‘어른의 말글 감각’의 한 구절이다. 그는 공간을 만지고, 시간을 만지고, 낱말과 문장을 만지라고 한다. 만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대상을 만나는 일이다. ‘경주’를 만지기 위해 직접 경주에 가거나, 가기 전에 지도를 찾아보며 그곳을 떠올리는 일이 만지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읽다가 단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겠는데 확실한 뜻을 모를 때, 사전을 뒤적거리는 일 역시 그렇다. 만지는 일은 의문과 질문에서 시작된다.

김경집 교수는 AI가 글을 쓰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구축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며, 사유하는 방식으로 ‘낱말 만지기’를 주장한다. ‘만지는’ 일이란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문장을 만진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뿐 아니라 중요한 낱말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함의와 변용 가능성까지 짚어 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만지다’는 단어는 언뜻 생각하면 손을 대어 대상을 건드리는 행위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니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뜻 말고도 “어떤 물건이나 돈 따위를 가지다”라는 뜻과 “물건을 다루어 쓰다”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결국 만지는 행위는 건드려 보고, 다루어 쓰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가지게 되는 일이 아닐까. 저자가 “내 안에 품고, 쓰다듬고, 벗겨내며, 토닥이고, 읊조리며,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서 나만의 해석을 내릴 때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다”고 한 구절을 읽었을 때, 그의 감각적인 통찰력에 반하고 말았다.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것을 내 안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만진다’는 것은 결국 ‘생각한다’는 것이다. 허락 없이 남의 몸을 만지면 절대 안 되지만, 남의 말은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많이 만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면, 말을 만지는 행위야말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김윤정(서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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