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 하나 주고 7일간 감금, 왜 안 죽였냐면… [본헌터㉙]

고경태 기자 2023. 10. 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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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픽션 : 본헌터㉙] 92살 생존자 인원
일요일마다 집앞에 와 기도하던 가해자와 교도관 아들 이야기
올해 92살. 지난해엔 73살 아들 춘성이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이 나이 먹도록 아들한테꺼정 다 안 한 이야기가 있다”며 할머니는 입을 열었다. 사진 고경태 기자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인원이여.

올해 아흔 두살이지. 그때 살아남은 사람 중에 제일 많디야. 작년에 간암으로 일흔 세살 아들 춘성이을 보냈어. 이 나이 먹도록 아들한테꺼정 다 안 한 이야기가 있어. 누구한텐가는 다 풀고 가야 할텐디. 그렇게 혼잣말을 내가 해싸. 그러면 함께 사는 며느리가 물어. 혼자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냐고. 내 속에 있는 말이 하도 많아서 그랴. 잊어버린 이야기가 여간 많은 게 아니지만 말이여.

진저리가 나. 그 난리통을 생각하면 말이여. 아이고 이놈들, 아이고 이놈들. 아직도 벌벌벌 떨려.

전쟁 나고 얼마 있다 감금돼얐어. 우리 집에서 감금돼얐어. 그놈들이 나를 못 나가게 하는 거여. 돌이 갓 지난 우리 아기하고 나하고만 아예 방 밖으로 외출금지여.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인디, 그 사이로 총을 디밀고 그래서 총구가 내 몸에 달락말락했어. 절대 밖으로 못 나간다면서 나가면 죽인다고 협박을 하는 거여. 죽일라면 그냥 죽이지, 왜 겁을 주냐고 그랬지. 살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하고, 빈총 가지고 위협하지 말고 나를 내보내라고 했어. 식구들 있는 데로 제발 나를 데려가라고 말이여. 그랬더니 가만 있으래. 언제까지 그래야 하냐니께, 다섯 밤은 새야 나갈 수 있디야. 다섯 밤을 어떻게 기다리냐고 하니께 막 또 총을 들이밀어. 나는 특별해서 가두는 거래. 나중에는 나를 시집 보내려 한대. 무슨 말이여. 제발 시어머니 좀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지.

다른 동네 사는 시누이 남편이 밥을 놓고 갔어. 처음에는 따끈따끈했겄지. 이놈들이 받아놓고 일 보다가 나중에 식어버린 밥을 들이밀어. 안 먹었어. 말라비틀어진 밥이 나중에는 세 그릇이나 되얐지. 반찬이 뭐 있어? 고추장하고 간장이지. 죽으면 죽고 살면 살자 그랬어. 내가 안 먹고 배가 쪼그라드니까 젖도 안 나오고 아기는 배고파 울다가 지쳐서 자고 그랬어. 놈들이 요강 하나 달랑 들여보냈지.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놋 요강이여. 소변도 한 번 안 봤어. 물도 한 모금 안 마셨으니께. 그렇게 다섯 밤이 아니라 일곱 밤을 지냈어.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냐고? 그러니께 우리 식구 다 죽이고 나랑 갓난쟁이만 살려준 거여. 나는 차마 죽일 수 없으니께 다른 가족 죽이는 동안 내가 못 나가게 못 보게 놈들이 지킨 거여. 뭐여 이게. 아주 진저리가 나.

나는 원래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강덕리에 살다가 아산으로 시집 왔어. 충남 아산군 염치면 석정리1구로 말이여. 아산은 울 친정 아버지 고향이여. 아버지가 친구 만나러 여기 다니러 왔다가 그냥 당신 맘대로 혼사 정한 거여. 나는 시집 안 간다고 했는데 그냥 억지로 한 거여. 내가 1931년생인데 그때가 열일곱이었어. 열여덟 되던 1948년에 아산으로 온 거지. 근데 전쟁 나고서 가해자 놈들하고 가까운 사람 중에 내 혼처를 구해준 친정아버지 친구가 있었던 거여. 그 양반이 사람 죽이려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놈들한테 갸 인원이는 절대 죽이지 말라고 한거여.

감금되기 전에 큰아주버님 부부(34살 옥형, 34살 정순)하고 남편(24살 오형)이 끌려갔어. 나보고 만날 남 앞질러다니지 말라고 타박한 남편이여. 내가 새벽에 물 길어오면, 당신은 남 앞질러 다니며 일하지 말라고,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했던 남편이여. (1950년 9·28) 수복되고 추석 지나서였어. 그 뒤에 어느날 시어머니(곡산 강씨, 57살)가 집에서 그러는 거여. “우리 가족들 다 끌어다가 죽인다는디 어쩌냐”고.

아홉살짜리 조카 국성이가 했던 말도 평생 잊혀지지가 않어. 부모가 끌려가고 없으니께 얼마나 불안했겠어. “작은 엄마, 작은 엄마 어디 가시면 나도 따라갈거요. 사람들이 그러는디 다 죽인대요. 작은 엄마 살면 나도 살려줘.” 울면서 애원을 하는 거여.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 죽으면 나도 죽어야 헌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시어머니랑 국성이란 둘 다 함께 나가선 돌아오지를 않았어. 그 어린 것, 밥도 못 멕이고 보냈는데. 에구 그러고보니 국성이 시신만 못 거뒀어. 지금 매재산 어딘가에 있을거여.

조카손자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빨갱이소리 너무 듣기 싫다”는 마지막 음성이 여운으로 남아 귓가에 맴돌았다. 사진 고경태 기자

논 때문에 그랬디야. 동네 지주 한 명이 이사를 가면서 내놓은 논을 우리 집안서 빨리 알고 샀거든. 근디 심씨네가 나중에 지들이 사겠다고 하면서 말다툼이 났디야. “사려면 진작 말을 하지. 왜 내가 산 뒤에 말을 허냐” 그랬더니 “너희는 똑똑해서 미리 말했고, 난 똑똑하지 못해 말을 못했다”고 막 다퉜대. 그것 때문에 심씨네가 앙심을 품었디야. 그 심씨여. 그 심씨가 나를 감금하고 지킨 대장이여. 그 심씨 밑에 신씨가 있었고, 또 서릿말 사는 또 한 놈이 있었어. 아이구 그놈들, 아주 진저리가 나.

나는 일곱 밤을 보내고 풀려나 안성 친정으로 갔어. 미쳤을 거여. 병이 생겼는지 눈도 잘 안 보였어. 내가 친정에서 미친 행동을 했디야. 정신이 휙 돌았을 거여. 친정 아버지가 이러다 사람 죽겠다고 그 난리통에 의사를 데려왔어. 의사가 귀한 약 구해 먹여줘서 살았어. 정신이 나니께 아산 석정리에 가봐야 되겠더라고. 가보니 세간살이가 하나도 없어야. 항아리는 비었고, 옷도 이불도 하나도 없고, 빈 농짝만 있어. 좋은 농짝은 다 가져갔어. 거지가 되었지. 밥 굶기를 예사로 했지. 남의 집에서 설거지해주고, 집안 치워주고, 그렇게 일해주고 밥 얻어 우리 아들 먹이고.

내가 한달 만에 나타나니께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봤어. 죽은 줄 알았나 보지. 안 돌아올 줄 알았겠지. 어떤 이는 나를 붙들고 한참을 쳐다보고, 어떤 이는 힐끔힐끔 보고, 어떤 이는 아예 못 본 척하고. 친정에서도 가지 말라고 했어. 뭐하러 가느냐고. 우리 가족 죽인 그놈들 보기 싫어도, 내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 나도 너희들 어떻게 사는가를 똑똑히 보겠다고 생각했어. 나 사는 것도 그놈들한테 보여주고 말이여.

그 대장놈 심씨하고는 한 번도 말을 섞은 적이 없어. 잘 사는 것 같더니 10년 뒤에 실종됐다고 들었어.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몹쓸 짓을 해서 벌받아 죽었다”고 했지. 나도 심씨는 용서를 안 했어.

그 밑에 신씨 놈이 있었지. 난리통 얼마 뒤에 외나무다리에서 원수 만나듯 마주친거여. 동네 빠져나가다가 길에서 말이여. 내가 “어디 갔다오시요?” 하니까 꾸벅 인사를 하더라고. 나보다 서너살 많은가 그랬는데 그때부터 서로 말을 하게 됐어요. 그러더니 한 1년 지나서부터 나한테 굉장히 잘 하는 거여. 뭐 먹을 거 생기면 마누라 통해 우리 집에 갖다주고. 그걸 받아놓고서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어. 그래 다 때를 잘못 만나 그랬겠지 하기로 했어. 주는 걸 왜 안 먹나 싶기도 하고.

그 신씨가 말이여. 교회를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일요일 아침 교회 갈 때마다 우리집 싸리문 앞에 와서 엎드려 기도를 하는 거여. “아저씨 기도하지 마셔. 나 교회 안 댕겨” 해도 지가 죄를 많이 지어 기도를 한대. 그렇게 일요일마다 우리집 앞에서 기도를 했어. 옆집 할머니가 내버려두래. “얼마나 지가 잘못했으면 그러겠냐”고. 그러다 2년인가 더 살다 병들어 죽었어. 신씨 그놈이 난리통에 완장 차고 다녔지. 대낮에 총 들고 마을 한 바퀴 휭 돌고.

그 마누라는 얼마 전까지 같은 마을에 살았어. 한참 전에 딸 시집 보낼 때는 혼수 이불 꿰매달라고 부탁까정 했어. 치마저고리도 꼬매달라, 이불 솜 놔달라 하지를 않나.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이런 부탁을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성의껏 바느질 다 해주었어.

아이고. 난리통은 다시 없을 줄 알았지. 그때 일곱 밤 갇혀있는 동안 엄마젖 하나 못 먹었던 갓난쟁이, 우리 아들 춘성이 말여. 춘성이가 공주교도소에서 교도관을 8년 했어. 어느날, 노는 날도 아닌데 공주에서 집으로 온 거여.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지. 힘이 하나도 없이 마당에 들어선 거여. 왜 왔냐니까 교도소 더 안 댕길거래. 돈도 얼마 못 벌어서 이제 그만둔다는 거여. “진짜여?”물으니 진짜래. 근데 밤마다 속을 썩는 거 같어. 그래서 짐작을 하고 얼마 있다 물어봤지. 그려. 내 짐작이 맞았어.

춘성이가 교도소에서 진급시험 볼 때마다 떨어진 거여. 웬만큼 시험을 잘 친 것 같은데도 계속 떨어지니 한 번 물어봤겠지. 어느날 교도소장이 부르더래. 이런 빨갱이 자식이 어디서 국가 녹을 먹으려고 하느냐고. 결국 짐을 싼 거여. 나는 나대로 울고, 지는 지대로 울면서 한탄을 하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친척네 쌀장사 하는데 가서 거들고, 붕어빵 장사도 하고, 신문도 돌리고, 노가다도 하고, 전국 오일장 다니면서 고구마 마늘 양파도 팔고 그랬지. 온양고등학교 나와서 공무원 시험 합격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디.

나라에 바라는 거? 그런 거 없어. 진희 지연 석희 우리 손주들 난리통 안 겪고 화 안 당하고 편안하게 살게 해주면 돼. 빨갱이 소리 너무 듣기 싫어. 그저 빨갱이 소리나 안 듣게 해줬으면 좋겠어.

아이고.

아주 진저리가 나.

<다음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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