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기뻐하라, 내일이 오지 않을 듯이 [김양희의 맛있는 야구]

김양희 2023. 10. 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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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LG 트윈스 정규리그 1위에 즈음해
6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엘지(LG) 트윈스 정규 시즌 우승 세리머니에서 선수단과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날 잠실구장에는 2만3750명의 관중이 가득 들어찼다. LG 트윈스 제공

그 해, 참 더웠다. 시험을 보다가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기도 했다. ‘공부만이 살길’이란 어른들의 채근에 책상에 앉아 엉덩이 근육만 단련해가던 그때, 위안을 주던 것은 엘지(LG) 트윈스였다. 연고지 서울시민도 아닌데 엘지를 좋아한 것은 순전히 MBC 청룡 때문이었다. MBC에서 청룡 경기를 많이 중계한 덕에 제주도 시골 소녀는 청룡 팬이 됐고, 청룡 구단이 엘지에 팔린 이후에는 엘지 팬으로 넘어갔다. 선수들이 그대로인데 팀을 갈아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야간 자율학습 때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몰래 한국시리즈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 1차전 김선진이 끝내기 홈런을 쳤을 때 책상 밑으로 손을 불끈 쥐면서 소리 없는 환호도 질렀다. 그리고, 그 해 엘지는 창단 첫해(1990년)에 이어 4년 만에 통합우승을 했다. 당시에는 야구 우승이 쉽게 보였다. 곧, 엘지는 또 다른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줄 알았다.

서울 소재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처음 잠실야구장을 찾았을 때의 울컥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텔레비전 화면보다 야구장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나의 대학 수첩엔 1995년 당시 잠실야구장 입장권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과 더불어 같이 야구장으로 가서 “무적 엘지!”를 외쳤다.

1995년 잠실야구장 티켓. 당시에는 내야석 티켓 가격이 5000원이었다. 김양희 기자

하지만 엘지는 1994년 이후로 ‘무적’이 되지 못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랬다. 한때 야구팬이었던 이가 스포츠 기자가 되고, 중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될 때까지도 엘지는 우승과 거리가 멀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더이상 특정 팀을 응원하지는 않게 됐지만, 그래도 ‘엘지’ 하면 고3 때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994년 우승 당시 그 순간, 그 느낌이 생생하게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때로는 암울했고, 때로는 아쉬웠던 시간을 지나 엘지는 지난 3일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통합 우승에는 이제 한국시리즈 4승만 필요하다. 29년 만의 ‘그것’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시리즈 직행 확정 직후 1994년 통합 우승 멤버였던, 그리고 한때 나의 우상이었던 김재현 엘지 전력 강화 코디네이터에게 전화했다. 축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직은 기뻐하기 이르다. 한국시리즈 우승 뒤에 진짜로 웃겠다.” 그래도 한국시리즈가 시작될 때까지 흥분되고 기쁜 마음을 가져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야구만큼 오늘의 기쁨을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

봄, 여름, 가을로 이어지며 일상과 함께하는 프로야구는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팬들은 144경기(정규리그 기준) 내내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행복해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여러 번 등 돌렸을 것 같은데, 야구라서 화해하고, 야구라서 용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해피엔딩’을 꿈꾼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감정은 켜켜이 쌓이고, 동질감은 점점 커져서 자아의 연장선이 된다. 삶의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프로야구 스토리는 그래서 힘이 있다. 야구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탓이다. 부산에도, 대전에도 이른 시기에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2005년)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광팬인 주인공 벤은 야구를 보는 행위에 대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뭔가에 영혼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규리그 1위가 결정 난 다음날(4일), 1면에 큼지막한 글씨로 ‘우승’, 두 글자가 박힌 스포츠신문을 찾아 편의점으로, 터미널로 떠돈 엘지 팬들의 심정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프로야구 또한 41살이 되었기에 디지털 스토리만으로는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프로야구 팬에게는 아직 남아 있다. 대체 구장 준비 없이 막연하게 6년간 잠실야구장을 비우라고 독촉하는 누군가는 절대 이해 못 할 감정이겠지만.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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