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수술 앞둔 구본무 회장이 서명했던 두 문서의 진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3. 10. 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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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판다]
구자경 LG명예회장(앞줄 왼쪽 세번째)이 2012년 4월 24일 서울 COEX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자신의 미수(米壽: 88세 생)연에서 기념떡을 자르고 있다. (이하 당시 직책) 사진 앞쪽 왼쪽부터 구본무 LG 회장, 구 회장의 부인인 김영식씨, 구 명예회장, 구 회장의 장녀인 연경씨, 구 회장의 사위인 윤관씨, 구본준 부회장의 딸인 연제씨, 뒷줄 왼쪽부터 구 명예회장의 3남인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의 부인 김은미씨, 구 부회장, 구본무 회장의 양자이자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 LG전자 차장, 구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회장, 구본능 회장의 부인인 차경숙씨, 구 명예회장의 4남인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구본식 부회장의 부인 조경아씨. /사진제공=LG


◇유언 메모를 남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2017년 4월 어느날 서울대병원 특실. 악성 뇌종양의 일종인 교모세포종 수술을 앞둔 구본무 LG 그룹 회장은 수술에 앞서 2가지 서류에 자필 서명했다.

이날 서명한 문서는 전날 LG 임원을 통해 준비시킨 것이었다. 앞서 구 회장은 전날 병문안 온 장남 구광모 상무(현 LG 회장) 부부와 장녀 구연경(현 LG복지재단 대표) 부부에게 "잠깐 병실에서 나가 있어라"고 한 후 LG재무관리팀장인 하범종 전무(현 경영지원부문장 사장)를 불러 혹시 수술이 잘못될 경우에 대비해 두가지를 당부했다.

하나는 수술 중 응급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연명치료 포기서(구 회장과 가족이 서명한 것)'를 잘 보관하고 있으라는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 회장 유고시 양자인 '구광모 당시 상무에게 경영권 재산을 전부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아들과 딸을 모두 병실에서 내보내고 회사 임원에게 이를 조용히 말한 이유는 혹여라도 자녀들이 섭섭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 전무는 이같은 구 회장의 구두 메시지(경영권 지분 관련)를 듣고 그날 바로 회사에 들러 그 내용을 A4용지 1장으로 정리해 이튿날 구본무 회장에게 전달했고 구 회장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이 메모에 자필서명했다. 구 회장 유고시 공개할 목적이었으나 4월 첫 수술이 잘 마무리되면서 별도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8개월 후인 12월 뇌종양이 재발해 재수술을 하게 됐을 때 구 회장은 다시 한번 하 전무에게 1차 수술 때 작성한 메모에 대해 "비상시나 유고시 이렇게 진행하면 된다"고 재확인했다고 한다.

구 회장은 당시 세계적 권위의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할 것을 권하는 지인들에게 "서울대병원에서 치료 못하는 것이면 존스홉킨스에 가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구 회장은 2차 수술 이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5개월 후 타계하면서 당시 하 전무는 자신에게 챙기라고 한 2가지 문서를 가족들에게 공개했다.

위독한 상황이 됐을 때는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문서대로 구 회장은 연명치료 없이 영면했다. 또 그의 타계 후 상속분할협의 과정에서는 '경영권 지분은 구광모 회장에게 전부 상속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김영식 여사와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광모 회장 등 가족들에게 공개했다.

공동 상속인인 이들 외에도 구 회장을 오랜 기간 보필했던 강유식 LG 부회장과 구자정 고문도 이 메모를 확인했다. 나머지 구본무 회장의 동생들의 경우 가풍에 따라 당연히 장자에게 경영권이 승계된다는 인식이어서 별도로 이 메모를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하범종 사장(이하 호칭은 사장)의 증언이다.

이같은 증언은 지난 5일 서울서부지법 제11민사부(박태일 부장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하 사장이 상속회복청구소송 첫 변론기일에 밝힌 내용이다. 하지만 구광모 현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양어머니인 김영식 여사와 여동생들은 이같은 문서를 보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해당 메모는 공동상속인들 모두 2018년 11월 상속재산분할합의서에 서명했고, 상속세 관련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모두 끝나 메뉴얼에 따라 폐기했다는 게 하 사장의 증언이다.

2018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구본무 LG 회장의 영결식에서 구 회장의 장남 구광모 LG전자 상무(현 회장, 사진 중앙)를 비롯한 유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이 구 회장의 큰 사위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 /사진=김성은 기자

◇우리가 모르는 LG家의 개인재산과 경영재산

일반 가정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LG의 경우 재산이 '개인재산'과 '경영재산'으로 분리돼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재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경영재산은 LG그룹을 경영하기 위한 주요 계열사 지분을 말한다. LG 재무팀에는 (주)LG와 주요 계열사 지분을 관리하는 '경영재산' 관리담당과, 이와는 별개로 회장 가족의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개인재산' 담당이 있다.

이날 재판에서 원고 측 대리인이 '경영재산'과 '개인재산'을 구분할 수 있느냐고 하 사장에게 질문하자 하사장은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각 재산은 각각 다른 팀원들이 나눠서 관리하고 있어 업무가 중복될 일이 없다고 소개했다. 선대 구본무 회장이 "경영권 재산은 구광모에게 전부 상속한다"고 했을 때 헷갈릴 일이 없다는 뜻이다.

LG에선 구자경 명예회장 때부터 LG 그룹의 안정적인 경영권 유지를 위해 친인척으로 구성된 '주주단'이 있었고 이 주주단의 운용에 대한 기본 지침도 내부적으로는 정해져 있었다.

2003년 LG가 지주회사로 전환한 직후 주주단에는 구씨 일가 외에도 동업자였던 허씨 일가까지 총 60명의 멤버가 있었고, 10년 후인 2013년에는 계열분리한 GS와 LS 등의 멤버가 빠지면서 36명까지 줄었다. 구본무 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이 타계한 후 지난 6월말 기준 주주단의 멤버수는 25명까지 떨어진 상태다.

증언에 따르면 이 주주단은 LG가에서 내려오는 공동 지침에 따라 움직였다. 이 주주단 구성원들이 받는 배당금의 80%는 세금을 내고 남는 금액으로 경영권 지분을 취득했고, 나머지 20%는 각 주주들에게 개별 지급됐다. 80% 중 상당부분이 장자인 회장의 지분율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LG 지분 매입에 주로 활용됐다.

이런 룰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경영할 때는 그대로 지켜졌고, 구본무 회장이 있을 때는 개별주주가 가져가는 배당금은 20%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10%만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는 게 하 사장의 증언이다. 주주단 구성원들은 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이처럼 운영되는데 이의가 없었다고 했다.


◇세차례의 상속 재산 조정...미술품은 하나하나 이름까지 썼다

구본무 회장 타계 직후 한남동 자택에 모인 유족들은 경영권 승계는 구광모 회장으로 한다는데 이의 없이 동의했다.

일부 언론에서 거론된 구본준 당시 LG 부회장이 임시로 회장직을 승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김영식 여사조차 반대하면서 구광모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에는 이론이 없었다.

상속재산분할과 관련해서도 핵심 경영재산인 구본무 회장이 보유한 (주)LG의 지분 11.28%는 구광모 회장 몫으로 이전하는데 처음에는 이견이 없었다. 원래 LG의 가풍이 장자승계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본무 회장의 유지가 담긴 메모에 '경영재산은 구광모 회장에게 모두 넘긴다고' 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8월 1차 초안대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 사장이 1차 초안을 들고 한남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김 여사가 "딸들이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고는 (주)LG 지분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걸 섭섭해 한다"고 해 하사장은 이를 구광모 회장에게 전했다. 구 회장은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동생들에게 어느 정도를 주는 게 좋을지"를 하 사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하 사장은 구 회장에게 "선대회장이 안정적인 1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지분이 15%(김영식 여사 4% 포함) 정도이니 15%를 넘는 지분은 여동생들에게 넘기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구 회장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구 회장은 자신이 원래 보유하고 있던 6.24%와 선대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11.28%를 합친 (주)LG 지분 17.52% 중 15%를 넘어서는 2.52%를 구연경(2.01%)·연수(0.51%) 자매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8월 1차안 당시에는 구광모 회장이 선대회장의 (주)LG 경영권 지분 11.28%를 전량 상속받는 대신 나머지 세사람이 내야할 상속세를 대신 납부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9월말에서 10월초 작성된 2차 상속재산분할합의안에서 (주)LG 지분 2.52%를 두 여동생에게 넘겨주기로 하면서 상속세는 각자가 내는 것으로 변경했다. 상속하는 만큼 각자가 상속세를 부담키로 한 것이다.

다만 LG가의 각종 제사나 집안 행사가 열리는 상징적 장소인 한남동 고 구본무 회장 자택의 경우 주택의 소유권은 김 여사와 두딸에게 넘기되 구광모 회장이 LG의 장자로서 해당 건물의 상속세는 자신이 내는 것으로 했다.

고 구본무 LG 회장 자택, 현재는 부인인 김영식 여사와 장녀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남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 차녀인 구연수씨가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진=오동희 선임기자


이 2차 안을 갖고 최종 합의서에 인감날인하려고 하 사장이 찾아갔을 때 다시 김 여사와 구연경 대표가 다시 이견을 제시했다. 당초 3곳이던 기부처를 자신들이 관련된 단체로 확대해 약 10곳으로 기부처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를 담은 3차 합의서가 11월초에 작성됐다.

구본무 회장이 소장했던 개별 미술품의 경우 '연경', '연수', '김(김영식)'이라고 그림 목록 옆에 이름을 하나하나씩 써가며 누가 가질지에 대해 정리하는 등 약 5000억원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빈틈 없이 세밀하게 챙긴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을 거쳐 김여사는 상속분할동의서에 '본인 김영식은 고 화담 회장님(고 구본무 선대회장의 호)의 의사를 좇아 한남동 가족(구연경, 구연수)을 대표해 ㈜LG 주식 등 그룹 경영권 관련한 재산을 구광모에게 상속하는 것에 동의함'이라는 문구 아래에 서명했다.

상속재산 분할과정에 깊은 논의 없이 유언장이 있다는 말만 믿고 재산분할에 동의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든 다양한 상속 논의 과정이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다.

한편, LG는 앞서 구자경 명예회장이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길 때도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60%를, 나머지 아들인 본능·본준·본식에게는 10.7%씩 총 32%를, 두딸인 훤미·미정에게는 각 4%씩 총 8%를 상속했다. 장자에게 경영권 지분 대부분을 넘긴 셈이다.

또 지난 2020년 타계한 구자경 명예회장의 남은 재산은 아들들이 아닌 장손인 구광모 회장에게 모두 상속했다. 이 상속에도 김 여사 등 원고들은 상속에 이의가 없다고 서명했다고 하 사장은 증언했다.

◇구연수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어머니 김영식 여사가 'YSK'로 대리 사인

이번 첫 변론기일에서는 김여사와 장녀인 구연경 대표 외에 공동상속인인 막내딸 구연수씨에게 상속과 관련한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을 쟁점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원고 측 대리인은 하 사장에게 '선관주의 의무'를 다했는지를 물으면서 구연수씨에게도 상속 관련 내용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하 사장은 "구본무 회장이 생존해있을 때는 구 회장이 가족들에게 재산관리에 대해 설명했고, 구 회장 타계 후에는 김여사가 구연수씨를 대신해 'YSK'라는 사인을 하면서 대리했다"며 상속재산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한편, 재판부는 이번 첫 변론기일에 쟁점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고, 이날 제출된 서증들이 원고 측에서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내달 16일 오후 한번 더 하 사장을 불러 증인 신문을 하기로 했다.

앞서 김 여사와 두 딸은 지난 2월28일 서부지법에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상속 재산을 다시 분할하자"며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냈다. 2018년 5월 별세한 구본무 전 회장이 남긴 재산은 LG 주식 11.28%를 비롯해 모두 2조원 규모이며, 이 가운데 세 모녀가 물려받은 재산은 약 5000억원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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