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해서 못타겠다”…돈없는 20대는 싫다는 경차, 회장도 엄빠도 반했다 [세상만車]

최기성 매경닷컴 기자(gistar@mk.co.kr) 2023. 10. 9. 07: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불편·불안하지만 싼맛에 타는 차?
30년 만에 꽃핀 작은 차 큰 기쁨
20대 아닌 30대 이상이 주요고객
산동네 봉사 활동을 펼치는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은 레이를 3대째 애용하고 있다. [사진출처= 박용만 전 회장 페이스북]
“작은 차 큰 기쁨”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국산 경차의 원조인 대우 티코(TICO)의 광고 카피입니다. Tiny(작은), Tight(촘촘한), Convenient(편리한), Cozy(아늑한)를 조합해 차명을 지었습니다. 티코 발음도 앙증맞은 느낌을 줍니다.

티코는 1980년대 정부가 진행한 ‘국민차 프로젝트’ 사업자로 선정된 대우조선이 일본 스즈키 알토 3세대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1991년부터 10년간 생산·판매한 차량입니다. 폭스바겐(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이 영감을 줬죠.

티코는 1991년 출시 당시 김혜수와 이영범이 신혼부부로 등장했던 광고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손님, 차비 주셔야죠”라는 김혜수의 말에 이영범이 뺨에 뽀뽀합니다. 차비를 뽀뽀로 대신할 정도로 연비가 좋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실제로 연비(수동모델 기준)는 24km/ℓ에 달했습니다. 요즘 전기차보다 더 각광받는 하이브리드 모델 뺨치는 수준이죠.

대우 티코 [사진출처=매일경제 DB]
티코는 출시 첫해에 3만여대가 팔렸지만 국민차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왕이면 큰 차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해 차량 구매력이 있는 중산층은 티코 대신 현대차 엘란트라나 쏘나타를 구입했기 때문이죠.

크기도 작고 안전성·편의성도 빈약한 티코를 비하하는 유머 시리즈도 판매에 악영향을 줬습니다.

“티코가 자동차면 파리는 독수리다”, “티코가 과속하는 이유는? 창피해서” 등이 대표적이죠. 심지어 티코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을 정도입니다.

티코는 ‘작은 차 큰 기쁨’을 주는 데 실패했지만 폭스바겐 비틀처럼 1990년대 국산 마이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습니다.

티코 이후 쉐보레 마티즈·스파크, 현대 아토스·캐스퍼, 기아 비스토·모닝·레이 등이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경차=생애첫차’ 등식도 확산됐습니다.

생애첫차에서 아빠·엄마차로
티코와 후손들 [사진출처=매앨경제 DB]
지금도 경차는 모아둔 돈이 부족한 20대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을 위한 ‘생애첫차’로 여겨집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운전을 못한다는 편견에 힘입어 20~30대 여성에게 차체가 작은 경차를 추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상은 달랐습니다. 20대는 경차는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오히려 20대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30~60대가 경차를 더 많이 구입했습니다. 20대 생애첫차가 아닌 아빠차·엄마차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사용하는 카이즈유 데이터연구소를 통해 연령별·성별 경차 구매현황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올해 1~8월 가장 많이 팔린 경차는 기아 레이입니다. 3만4003대 판매됐습니다. 현대차 캐스퍼는 2만8389대, 기아 모닝은 1만7603대, 지금은 단종된 쉐보레 스파크는 1522대 각각 팔렸죠.

레이(왼쪽)와 모닝 [사진출처=기아]
개인 구매자(법인 제외)를 연령대별로 분석해보면 레이는 40대가 가장 선호했습니다. 40대 비중은 34.6%에 달했습니다. 30대는 23%, 50대는 22.3%, 60대 이상은 14.1%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20대는 5.9%에 불과했습니다.

캐스퍼의 경우 30대 비중이 27.7%로 가장 높았습니다. 40대는 23.7%, 50대는 21.7%, 60대 이상은 14.5%였습니다. 20대는 12.4%에 그쳤습니다.

모닝은 50대 이상이 가장 많이 샀습니다. 50대가 34.1%, 60대 이상이 31.4%, 40대가 18.6%, 30대가 10.4%로 나왔습니다. 20대는 5.5%에 머물렀습니다.

성별로 살펴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경차를 많이 샀습니다. 레이 구매자 중 남성이 57.8%, 여성이 42.2%였습니다. 캐스퍼도 남성 구매자 비중이 51%에 달했습니다.

모닝도 구매자 중 53.2%가 남성으로 집계됐습니다. 경차는 여성이 선호하다는 일반적 인식과 다른 셈입니다.

캐스퍼 [사진출처=현대차]
아빠·엄마는 물론 제네시스 G90, 벤츠 S클래스, 롤스로이스 팬텀 등을 탈 것으로 연상되는 대기업 회장도 20대가 외면하는 경차에 반했습니다.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은 레이를 타고 산동네 봉사 활동을 다니고 있습니다. 레이를 3대째 구매했다는 그는 지난달 7일 소셜미디어(SNS)에 레이를 극찬하는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박 전 회장은 “(봉사를 다닐 때) 골목길이 비좁고 주차도 아주 어려운 동네를 다녀도 걱정이 없다”면서 “주방서 만든 반찬을 배달하느라 레이를 탈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한다”고 말했죠.

그는 “소형차이지만 실내가 워낙 넓고 천정이 높아 아주 쾌적하고 짐이 한 없이 들어간다”며 “게다가 뒷문 중 하나는 슬라이딩 도어라 좁은 골목에서 차에 타고 내리는 데 문제가 없다”고 설명습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에서 만든 자동차 중 칭찬받고 상 받아야 하는 차가 기아 레이”라면서 “우리나라 환경에 가장 필요한 차를 참 안성맞춤으로 잘 만들었다”고 극찬했습니다.

“경차는 싸야 팔린다” 이젠 옛말
모닝 [사진촬영=최기성 매경닷컴 기자]
아빠·엄마는 물론 대기업 회장도 반한 경차는 ‘싼 맛에 어쩔 수 없이 타는 차’라는 인식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오히려 비쌀수록 더 많이 팔렸습니다. 가격이 비싸지더라도 안전성과 편의성을 상위 차량 수준으로 끌어올린 중·고가 트림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기아에 따르면 올해 판매된 레이의 경우 가장 저렴한 트림인 스탠다드 선택비율은 6%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고급 트림인 시그니처는 50%, 중간 트림인 프레스티지는 40% 정도로 나왔습니다.

최고급 트림으로 풀옵션 가격이 2000만원을 넘는 그래비티는 7% 수준이었습니다. 가장 싼 트림인 스탠다드보다 더 많이 판매됐습니다.

모닝(밴 제외)의 경우 가장 비싼 트림인 시그니처 선택비율은 29%, 그 다음으로 비싼 프레스티지는 58%에 달했습니다.

모닝 중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스탠다드는 13%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중·고가 트림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레이(위)와 캐스퍼 [사진출처=기아, 현대차]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20대 운전자는 소유보다는 공유에 익숙해 차량이 필요할 때는 경차가 주로 배정되는 카셰어링을 이용한다”며 “차를 살 때는 좀 더 폼나고 레저 활동에도 적합한 소형 SUV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도 “돈을 좀 더 보태면 소형 SUV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오른 게 20대의 경차 외면에 영향을 줬다”며 “대신 경차 구입을 꺼리게 했던 불안·불편을 없애주는 안전·편의사양을 갖춘데다 차박(차+숙박)도 가능해지고, 1가구 2차량 시대가 되면서 30대 이상 구매자는 많아졌다”고 풀이했죠.

그는 아울러 “경차는 ‘돈 없는 사람이 타는 차’라는 인식이 깨지면서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구입하는 소비자들도 많아졌다”며 “30대 이상 싱글족, 딩크족, 자녀와 따로 사는 부모 등이 이제는 경차 주요 구매자가 됐다”고 덧붙습니다.

티코가 쏘아올린 캐치프레이즈 ‘작은 차 큰 기쁨’이 30년 만에 실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