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정쟁 국회’가 방치한 ‘위헌’ 법률...내년 총선 전 고쳐야 할 법만 14개
(시사저널=김현지·조해수 기자)
결혼 4년 차 여성 이아람씨(가명·32)는 2022년을 잊을 수 없다. 그해 여름, 이씨에게 둘째 아이가 생겼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계획에 없던 임신이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통해 낙태하기로 했다. 낙태죄는 이미 2019년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병원을 찾은 이씨에겐 "낙태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답변이 돌아왔다. "국회가 대체 법안을 마련하지 않아 정확히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입법 공백으로 전문가마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5주 차 미만만 수술한다" "9주 차까지 가능하다" 등 수술 기준도 병원마다 제각각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이씨는 결국 중절수술을 했지만, 당시 느낀 불안은 국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씨가 겪은 혼란은 국회의 '직무유기' 탓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 본연의 임무인 '입법권'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정쟁과 당리당략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심지어 국회는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에 대해서조차 손을 놓고 있다. 국회의 법 개정을 필요로 하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헌법불합치는 위헌이지만 법적 효력을 즉각 없애지 않는다. 사회적 혼란 등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대신 헌재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에 법률 개정 시한을 제시한다. 이때까지 새로운 법을 만들라는 뜻이다. 개정 시한 전까지만 기존 법이 유효하다. 문제는 개정 시한까지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지 않을 때다. 법이 사실상 사라지는 '입법 공백'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현재 헌법불합치로 결정된 법률 중 미개정된 것은 모두 22개다. 이 중 헌재가 제시한 개정 시한상 내년 4·10 총선 전에 21대 국회에서 개정돼야 할 법률은 14개에 이른다. 특히, 10월4일 기준 개정 시한을 이미 초과한 법률만 4개나 된다. △낙태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에 대한 처벌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옥외집회 금지 △보안관찰 대상자의 출소 사실, 거주지 변동 등 신고(7일 이내) 의무화 △국내 주민등록이나 거소가 없는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 행사 제한 등이다(표 참조).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법률은 신속한 개정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을 경우 혼란을 피할 수 없다. 낙태죄를 살펴보자. 여성의 낙태 결정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조항은 개정 시한 다음 날(2021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이 새로 정해지지 않아 현장에선 혼선이 빚어졌다. 2년여가 지난 현재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10월4일 서울 소재 병원 10곳에 문의한 결과, 5곳만이 인공임신중절수술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이마저도 수술 가능 기준인 임신 주수가 5~10주로 병원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 없이 낙태약이 무분별하게 유통되기도 한다. 먹는 낙태약으로 유명한 A는 의사의 관찰하에 복용해야 한다. 부작용이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A는 30여만원만 지불하면 온라인상에서 누구나 구매가 가능했다. 임신 주수 등 구체적인 복용 기준을 법률로 정해야 하지만 국회가 직무를 유기한 결과, 누구도 끔찍한 부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낙태죄의 입법 공백은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사저널은 법원 판결문 시스템을 통해 '형법'과 '낙태' '임신중절'을 키워드로 검색된 판결문 225건(중복 사건 포함)을 전수 분석했다. 기간은 낙태가 합법화된 2021년 1월1일부터 올 10월3일까지다. 이 중 △여성이 상대 남성 등에게서 낙태 사실로 인한 협박을 당한 경우(4건) △약사가 여성들에게 불법 낙태약을 판매한 경우(2건)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패륜범죄까지 일어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일부 여성은 제각각인 중절수술 임신 주수 기준 때문에 낙태 시기를 놓쳤다. 이에 원치 않는 아이를 출산하게 됐고, 이는 영아 살해 혹은 영아 살해미수 사건으로 이어졌다. 불법 낙태약 판매자가 낙태약을 먹고도 출산한 여성에게 사체 유기 방법 등을 안내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모두 7건인 것으로 파악됐다. 영아 유기, 아동학대, 살인 등을 저지른 경우는 2건이다.
유미숙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외협력국장은 "청소년을 포함한 여성들이 낙태약 구매 문의부터 낙태 수술 등의 상담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이와 연계된 모자보건법(강간 등 수술 가능한 예외 사항 규정 조항)은 여전히 미개정 상태"라고 비판했다.
13년째 잠든 집시법…정쟁 일자 '부랴부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은 무려 14년 전인 2009년 9월 헌재의 헌법불합치 판단을 받았다. 문제가 된 조항은 야간 옥외집회 금지 부분이다. 헌재는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야간)' 옥외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부득이한 경우 관할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도록 한 조항이 사실상 위헌이라고 봤다. 그러나 국회는 개정 시한(2010년 6월30일)까지 법을 정비하지 않았다. 이후 헌재는 2014년 3월 이와 관련한 위헌법률심판 사건에서 '해가 진 후부터 같은 날 자정까지의 시위'를 처벌하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국회를 향해선 '시간을 기준으로 한 입법 개선'을 당부했다.
최근 이 문제는 또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부 노동조합의 집회가 계기였다. 경찰은 지난 5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건설노조의 노숙집회 이후 심야 집회 단속을 공론화했다. 경찰은 9월21일 "헌재의 입장은 집회와 시위 금지 시간대가 광범위하고 가변적이라 과잉금지 원칙 위반이라는 것"이라며 "(자정 이후) 심야시간 집회·시위 금지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9월19일 전국금속노동조합이 서울영등포경찰서장을 상대로 낸 심야 노숙집회 금지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경찰의 심야 노숙집회 금지가 헌법상 집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반면, 정부·여당은 심야 집회 금지를 골자로 한 법률 개정안을 냈다. 국가 기관마다 해석과 입장이 제각각이다 보니, 개정안 마련에도 큰 진통이 예상되고 있다.
헌법불합치 미개정 법률은 정쟁의 수단이 돼야만 주목을 받는다. 국민투표법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국면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대선 직후에 검찰의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민투표법 역시 위헌 법률이었다. 헌재가 2014년 7월 국내 주민등록이 되지 않거나 거소 신고가 안 된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이 제한된다는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회는 개정 시한(2015년 12월31일)을 넘기고도 약 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법을 정비하지 않았다. '약사들로 구성된 법인의 약국 개설 금지' 법률은 무려 헌법불합치 20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초유의 '선거구 공백 상태' 이르기도
국회가 기한 내 법을 고치지 않아 '선거구 무법 상태'가 된 전례도 있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10월30일 '공직선거법에 따른 인구편차 3대1로 획정된 지역 선거구가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다'는 헌법소원 심판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편차가 2대1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는 국회의 개정 시한을 2015년 12월31일로 못 박았다. 이에 따라 국회는 20대 총선과 관련한 선거구 논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야 셈법이 달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개정 시한을 넘겼다. 선거구가 없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국회는 2016년 3월2일에야 합의안을 처리했다. 이에 따라 19대 총선(2016년 4월13일) 직전인 2016년 3월3일에야 법이 시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선거사범에 대한 처벌도 논란이 됐다. 일부 후보자는 선거구 공백 기간에 기부행위 등 선거법을 위반한 혐의로 무더기 기소됐다. 법원의 엇갈린 판단 때문에 후폭풍이 거셌다. 대법원 제1부는 2017년 4월13일 '선거구 공백 기간 후보자의 지역 유권자에 대한 물품 제공 행위는 기부가 아니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그런데 대법원 제3부는 2017년 12월5일 선거사범을 선거법상 매수죄로 처벌 가능하다고 봤다. "매수행위 당시 선거구가 획정되거나 유효한 선거구가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다"는 것이 대법원이 밝힌 이유였다. 그러는 사이 국회에 책임을 묻는 일은 무산됐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선거구 획정안 늑장 처리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온 20대 국회 역시 위헌 법률을 모두 개정하지 못했다. 국회사무처가 2020년 6월12일 발간한 '제20대 국회 위헌 헌법불합치 법률 정비 현황' 자료를 보면, 헌법불합치 판단을 받은 법 가운데 시한을 넘긴 미개정 건수는 7건이다.
해외에도 위헌 법률의 입법 공백 상황이 있을까. 우리나라와 법체계가 비슷한 독일에도 헌법재판소 제도가 있다. 이곳에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독일 입법부의 개정안 늑장 처리는 흔하지 않다고 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입법 공백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다면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라며 "개정안은 사전에 정비해야 한다. 법이 사후약방문이 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국회의 직무유기로 국민의 국회 불신을 키운다"며 "국회부터 법을 안 지키는 모습이 법에 대한 국민의 일반적인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늑장 처리하면 국회에 손해배상 청구해야"
국회에 대한 규제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불합치 법률과 관련한 행정부, 소속 국회 상임위원회, 국회사무처 법제실과 의안과, 법제처 등에 미개정 건을 통보한다. 국회가 입법 의무를 다하지 않는 데 따른 헌법소원, 국가 배상 등의 방법도 있다. 다만 입법부인 국회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이는 무용지물이다. 헌법불합치 미개정 법률로 인한 헌법소원은 현재까지 없었다는 것이 헌재 측 설명이기도 하다. 입법-사법-행정부 간의 삼권분립 체계상, 헌법재판소가 국회를 상대로 직접적 규제를 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을 지낸 황도수 건국대 교수는 "입법 시한이 지난 법안들은 위헌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상 국민 전체에 효력을 미치는 상황"이라며 "민사소송법에 준용해 '국회가 언제까지 안 하면 매달 얼마씩 손해를 배상하라'는 간접 강제 소송을 최후 수단으로 제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머그샷 공개법·보호출산제' 민생치안 법안 가까스로 통과
국회는 이번 정기국회 기간에 민생법안 처리를 천명했다. 하지만 9월2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 여파로 본회의가 열리지 않아 자동 산회됐다. 이에 따라 98건의 안건 가운데 90건이 처리되지 못했다. '보호출산제' '머그샷법' 등 주요 민생치안 법안도 포함됐는데, 이러한 법안들은 10월6일에야 국회 문턱을 넘었다.
10월6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주요 법안은 '보호출산제'다. 이는 임신부가 상담을 거쳐 병원에서 익명으로 출산이 가능하도록 한 법(위기 임신과 보호출산 지원 등과 관련한 특별법)이다. 중대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검거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머그샷 공개법'(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도 본회의 처리 전이다. 신상이 공개된 피의자의 사진이 현재 모습과 다르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이에 따라 구금 과정에서 피의자의 얼굴을 촬영하는 '머그샷'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 밖에 △음주운전 위반 전력의 운전자 차량에 음주운전 방지 장치 부착 의무화(도로교통법)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보험업법) △국가·지자체의 노인 일자리 등 지원(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법) △전통시장 화재안전 확보 등(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등도 가결됐다. 모두 국민 실생활과 직결된 법안이다.
다만,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은 부결됐다. 표결 결과 재석의원 295명 중 찬성 118명, 반대 175명, 기권 2명으로 집계됐다. 임명동의안은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재석 의원 과반 찬성이 있어야 통과된다. 부결을 당론으로 정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에서 대거 반대표가 나온 것으로 해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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