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숨은 보석, 메솔롱기
광활한 라군의 고즈넉함과 아담한 도시의 다정함이 매력적인 메솔롱기.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홀리시티', 여행자에게는 '스윗시티'로 기억되는 메솔롱기를 여행했다.
●여러 빛깔의 그리스를 보다
신화와 섬. 그리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두 가지 키워드다.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메솔롱기(messolonghi)에 가서야 알았다. 신화와 섬을 뺀 그리스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여행자에게 그리스 역사는 고대에 머물러 있었고 풍경은 코발트빛 바다와 새하얀 집에 한정되어 있었다.
아무 정보 없이 도착한 메솔롱기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그리스의 모습을 만났다. 독립을 위해 투쟁한 메솔롱기 사람들, 자유를 위해 그리스에 헌신한 영국 시인 바이런과 조우했다. 고즈넉한 도시와 평화로운 라군에서 여행의 재미를 만끽했다. 메솔롱기에 다녀온 후, 그리스에 대한 이미지가 무지개색만큼 다채로워졌다.
●그리스의 유일한 '홀리시티'
메솔롱기, 이름부터 생소하다. 메솔롱기라는 이름의 어원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호수 사이'를 의미하는 '메조랑기(mezzo langhi)'라고 부른 데서 왔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그리스 서부 에톨로아카르나니아(Etoloakrnania)현의 현청 소재지로, 수도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45km 떨어져 있다. 2023년 현재, 인구는 1만8,000여 명. 몇 해 전까지만 해도 4만명을 육박했지만 대학이 파트라(Patra)로 옮겨지면서 사람도 줄었다.
인구는 많지 않지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메솔롱기 엑소더스(1826년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메솔롱기 주민들이 성을 탈출했던 사건)'는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쳐,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도시이자 자유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그리스에서 가장 큰 라군(석호)이 형성되어 있어, 거친 바다와 다른 매력을 풍긴다. 무엇보다도 소도시를 여행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눈이 마주치면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거나 손을 흔들어 주는 할머니, 골목 구석구석에 출몰하는 고양이, 지도를 들고 우물쭈물하는 이에게 길을 알려 주는 청년까지 다정함으로 똘똘 뭉친 도시다.
●시인 바이런의 흔적
메솔롱기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가 보자. 반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이름은 바이런이다. 맞다. 19세기 초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다. 천재이자 미남 인데다, 솔직하고 과감한 시인.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라는 장편시로 유럽 사교계의 아이돌로 떠오른 바이런은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유명해졌다'라는 대사의 주인공이다.
영국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그리스에 대한 애정과 희생정신 때문이다. 런던에서 화려한 생활을 했던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전쟁 때 스스로 군대를 조직해 메솔롱기에 와서 참전했다. 안타깝게도 전투를 기다리던 중 열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1824년 4월19일 세상을 떠났다.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메솔롱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바이런에게 감사하며 그를 애도하고 있다.
도시 곳곳에서 바이런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이런과 필헬레니즘 박물관(Research Center & Museum for Lord Byron and Phihellenism)이다. 바이런의 삶을 기리고 작품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바이런을 좋아하는 이라면 꼭 들러 봐야 할 박물관이다. 옆에는 바이런 동상이 늠름하게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도시를 휩싸던 독립의 물결
당시 바이런이 참전한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에 맞선 그리스의 독립운동이었다. 1822년 그리스가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하자 오스만제국은 심한 탄압을 가했다. 오스만제국 군대가 여러 차례 메솔롱기를 포위하면서 침략했다. 성안에 포위된 주민들은 보급로가 차단돼, 먹을 게 없어 처절한 생활을 이어 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메솔롱기 주민들은 1826년 4월10일 성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이것이 '메솔롱기 엑소더스'다. 가슴 아프게도 이 계획은 오스만 군에게 새어 들어갔고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 메솔롱기는 초토화되었지만 메솔롱기 주민들의 용기와 신념은 그리스 전역에 있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았다. 1926년 그리스는 해방됐다.
메솔롱기의 이런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보트사리 광장(Botsari Square) 한쪽에 있는 역사와 예술 박물관(Museum of History and Art)이다. 시청 건물을 개조한 박물관으로 메솔롱기 엑소더스에서 영감을 받은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은 전쟁의 처절함을 여실히 보여 줬다. 박물관 해설사 안젤라는 "여인의 비장함을 보세요. 아이를 죽이고 자결하기 직전이에요. 죽음을 택한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요"라며 작품 하나하나 애정을 가지고 소개했다.
박물관 1층에는 바이런의 초상화와 유화, 그가 나눈 편지 등 바이런 유물만 모아놓은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입구에는 메솔롱기에서 배출한 그리스 총리 하릴라오 트리쿠피(Harilao Trikoupi)와 에파미논다 델리조르지(Epaminonda Deligiorgi) 흉상이 서 있다. 광장 이름인 보트사리도 전투를 이끈 마르코스 보트사리 장군 이름에서 왔다.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
메솔롱기는 진한 역사만큼이나 자연이 아름다운 도시다. 아첼로스(Acheloos)강과 에비노스(Evinos)강의 삼각주에 형성된 라군으로 그리스에서 가장 크다. 이곳은 물이 잔잔하고 얕은 구역이 많아 새가 안전하게 알을 부화시키기 적당하다. 그래서 난쟁이 갈매기(Nanoglarona), 노란 핀치새(Koridali) 등 희귀 새를 비롯해 약 270종의 새가 둥지를 틀고 있다. 또 펠리컨이나 바다거북 등 다양한 생명체가 서식하고 있어, 람사르 협약에 따른 보호를 받고 있다.
메솔롱기 라군에서 인상 깊은 곳 중 하나는 해안에서 투를리다 섬까지 이어지는 5km 길이었다. 마치 썰물 때 열리는 제부도 바닷길처럼 수면과 가까운 곳에 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양쪽에 바다가 펼쳐져,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라군의 풍경은 거친 바다 풍경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물 위에는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어부들이 쉬기 위해 만든 건물로, 라군에 의지해 살아온 메솔롱기 어부들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해질녘이 되면, 광활한 라군 뒤 하늘이 빨갛게 물들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낸다.
●카약 타고 고즈넉한 라군 즐기기
라군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카약 타기다. 가이드 니콜라스는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새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라군. 세상을 모두 반사시킬 만큼 잔잔한 바다가 이어졌다. 노를 젓다 보니,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배를 타고 섬들의 이름을 읊조리며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갈 때 내 마음은 천국을 향해 가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낀다."
카약을 타다 니콜라스를 따라 작은 섬에 잠시 내렸다. 클리소바(Klisova Islet)라는 이름의 이 섬은 1826년 치열한 전투의 현장으로, 성 삼위일체 교회가 남아 있었다. 메솔롱기의 평화가 영원히 이어지길 기원하며, 교회 위에 달린 종을 울렸다.
라군에서 천연 머드와 소금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다. 라군에는 피부에 좋은 천연 머드 해변이 있어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한가롭게 머드 스파를 즐기는 이들을 보니, 차에서 내려 바다로 당장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금박물관도 특별했다. 메솔롱기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염전이 있어 그리스에서 소비되는 소금 중 65%를 생산한다고 했다. 소금박물관에서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소금 이야기를 한자리에 전시하고 있었다.
●다정한 이들을 만나고 싶다면
아담한 메솔롱기 시내를 돌아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가로수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였고, 가로수 아래에서는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맥주를 나누고 계셨다. 어르신들은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할머니들은 집 앞에 의자를 놓고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 멀리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고 놀라워하셨다. 고양이는 어찌나 많은지, 메솔롱기 주민증이라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메솔롱기는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자를 환대했다.
메솔롱기 시내의 명소는 영웅들의 정원(Garden of Heroes)이다. 독립전쟁 때 희생된 메솔롱기의 전사들이 묻혀 있다. 큰 역할을 한 마르코스 마트사리 장군을 비롯해 바이런 등 여러 인물들의 동상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히어로스 가든을 둘러본 후에는 코스티스 팔라마스(Kostis Palamas), 트리코우피스(Trikoupis) 박물관을 찾아 보자. 코스티스 팔라마스는 올림픽 찬가의 가사를 지은 그리스의 시인으로, 이곳에는 그의 생애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트리코우피스 박물관은 1840년대 건물로, 그리스 역사와 정치에 유명한 트리코우피스 가문의 집이다.
●메솔롱기의 로컬 오브 로컬
명소를 둘러본 후에는 구글 맵을 끄고 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우연히 오렌지 불빛이 끌리는 상점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메솔롱기의 에너지 넘치는 현재를 만났다. 메솔롱기바이로컬이라는 공간이었는데, 지역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판매하는 제품에도 '로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라군에 사는 장어를 모티브로 한 에코백, 폐신문을 이용해 만든 연필, 물고기 모양의 펜던트 등 메솔롱기 로컬의 특색을 담은 작품들이 많았다.
공간의 구석구석을 소개해 주던 직원은 메솔롱기 로컬의 문화를 매개로 주민과 주민, 여행자와 주민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자신도 화가라고 소개했다. '어린이들의 어부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라던 그의 환한 얼굴을 보며 메솔롱기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자연 그리고 다정하고 따스한 사람들. 이보다 여행자에게 더 필요한 게 있을까.
▶TRAVEL INFO
AIRLINE
2023년 9월 기준, 한국에서 아테네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터키항공을 타고 이스탄불을 경유하거나 에티하드항공을 타고 아부다비를 들러 아테네로 들어가야 한다. 터키항공 오전 11시35분 출발편을 이용하면 가장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 경유 시간 포함, 약 14시간 40분 소요.
TIME GAP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여름에는 서머타임 적용으로 6시간).
VISA
90일 동안 무비자 체류 가능. 코로나19 관련, 별도로 필요한 서류는 없다.
CURRENCY
유료(EUR)를 사용한다.
HOTEL
소크라테스 빌리지(Socrates Village) 메솔롱기에 다시 간다면, 이 숙소에 묵을 생각이다. 올리브를 가꾸는 유기농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어 그리스의 전원을 만끽할 수 있는 데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아름다운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다. 여기에 맥가이버 같은 매니저가 있어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척척 해결해 준다.
RESTAURANT
올라 시마(Ola Xyma) 그리스 최초의 약국이 있던 자리를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 그리스 현지 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강력 추천. 손맛 좋은 주인 덕분에 제대로 된 그리스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
TIP
걸어서 시내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자전거 이용을 추천한다. 평지라 자전거를 타기 쉽고, 일부 구간은 자전거 전용도로도 마련되어 있다. 해안선을 따라 달릴 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전거 가이드 투어도 있으니 참고.
▶유기농 농산물로 채운 건강한 그리스 식단
항생제 제로, 화학비료 제로. 건강한 방식으로 재배한 그리스의 오가닉 푸드에 대해 알아봤다.
건강 식단의 중심, 올리브
그리스 식단은 건강을 꿈꾸는 이들이 바라는 식단이다. 그 중심에 올리브가 있다. 메솔롱기에 도착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도 올리브였다. 숙소 주변은 물론, 산에도 빼곡하게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수확할 때가 되지 않아 손톱만 한 올리브이긴 했지만,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리스가 대표적인 올리브오일 생산국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에서는 고품질의 올리브 열매로부터 유기농 올리브오일을 만든다. 올리브오일은 고유한 풍미와 건강에 이로운 성분을 가지고 있어 대표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거칠지만 건강한 당근과 수박
이번 여행에서 귤과 당근, 감자, 수박을 재배하는 농장을 돌아봤다. 제초제를 쓰지 않아 곳곳에 풀이 자라고 있었지만, 작물들이 생기를 유지하며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밭에서 막 캔 오렌지빛 당근을 보니, 매 끼니 샐러드가 빠지지 않는 그리스식 식단이 건강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페타 치즈를 비롯해 오이와 파프리카, 토마토 등 건강하게 키운 작물이 한가득 들어가 있으니까.
EU 오가닉 푸드 인증마크, 유로리프
올리브오일 외에도 그리스에서는 오가닉 푸드(organic food)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가닉 푸드는 화학비료나 항생제, 살충제, 유전자 조작 등 인공적인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된 작물이나 축산물로 생산한 식품을 말한다. 화학적 처리를 거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복지를 고려한 방식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풍부한 영양소를 담고 있다. 유럽에서는 유기농 재배 원료가 최소 95% 이상 포함되고, 친환경 생산방식을 준수한 제품에 대해 유기농 인증마크인 유로리프(Euro-Leaf)를 붙인다.
바이오넷 웨스트 헬라스에 가다
유럽 유기농 농장을 직접 둘러보기 위해 바이오넷 웨스트 헬라스(Bionet West Helas)를 방문했다. 그리스 서부에 있는 소규모 유기농 농장들의 협력체로, 회원들의 농작물을 공동으로 패키징하고 마케팅한다. 이곳의 유기농 농장에서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 거칠지만 건강하게 작물을 기른다. 화학물질 사용 금지는 물론이고, 유기 폐기물을 100% 활용해 자원을 순환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필요한 에너지원은 가능한 한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다.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현대 과학지식을 연결해, 환경에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좋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들의 원칙이다. 농장은 농장주와 가족이 직접 운영하고 수확기에 일손이 필요할 때만 별도 인력을 고용한다. 이렇게 재배된 유기농 생산물은 EU 유기농 라벨이 붙여지고, 유럽 여러 나라로 수출된다.
글 채지형 사진 조성중 에디터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EU ORGA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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